‘소나기펀치’의 대명사 ‘작은 들소’ 유명우

‘소나기펀치’의 대명사 ‘작은 들소’ 유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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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무림 역사상 절대지존 삼인(三人)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유명우, 이승엽, 박지성이었다. 이들 삼인은 각기 서로 다른 분야에서 절세신공을 연마, 무수한 적과 부딪치며 전설의 반열에 올라 세인들의 절대적인 사랑과 추앙을 받았다. 이들에게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아를 성찰하며 새로운 무공을 연마해 가는 부단한 노력이었다. 이들은 흘린 땀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 다는 불변의 진리를 가슴속에 새겨 두고 있었다.

둘째,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은 법,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는 만고의 진리를 아로새겨 두고 상대방의 장단점에 대한 연구와 자신의 장점을 발전시키고 단점을 보완해 가는 끊임없는 공부와 성실함이다.

셋째, 제16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절대지존이 갖춰야 하는 덕목은 정의, 용기, 불굴, 절제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절제라 했다. 이들 삼인방은 절제력이 있었다.

1980년대는 대한민국 무림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였다. 한때는 다섯 체급의 지존을 동시에 보유 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주니어 플라이급의 유명우, 장정구라는 절대고수가 WBA, WBC 타이틀을 거머쥐고 천하를 양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장차 무림역사상 위대한 맹주의 반열에 오를 유명우는 1964년 1월 10일, 서울시에서 태어난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급우가 우연히 가져온 복싱 글러브를 마주하게 되고 숙명처럼 복싱이라는 무림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한강중학교 진학 후 어린 소년은 바로 봉천동 대원체육관으로 찾아 간다.

소년은 천재성과 타고난 성실함으로 하나 둘씩 기본 초식을 다진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 않았다. 작은 키와 짧은 리치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체적 열세는 룰이 까다로운 아마추어 복싱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아마전적이 1승 3패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그의 무공은 웬만한 고수와도 대등하게 비무를 할 정도였다.

유명우가 고3이 되던 1982년 3월 28일, 그는 프로세계라는 험난한 강호에 발을 들인다. 데뷔 후 1983년 12월까지 파죽의 13연승을 장식한다.

해가 바뀌고 유명우는 세 차례에 걸쳐 링에 오른다. 4월에 리틀 바지오를 KO로 잠재운다. 그가 강호에 발 들인 뒤 최초의 KO승이었다. 이때부터 자신의 단점이었던 파괴력마저 더해진다. 한 달 보름 후 강호 정비원을 동양태평양 타이틀 전초전에서 판정으로 제압하고 12월 2일 필리핀의 고수 챔피언 에드윈 이노센시오를 서울 문화체육관으로 불러 KO로 요절내고 동양타이틀을 획득한다.

1984년 2월 24일, 유명우는 투바그스 자바를 닭 모가지 비틀 듯 가볍게 KO로 물리치고 동양타이틀 1차 방어에 성공한다. 그의 시선은 이미 세계타이틀에 가 있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다가 왔다. 단, 넘어야 될 산이 있었다. 그 산은 동급 세계랭킹 4위인 청년고수 손오공(본명 손정구)이었다. 손오공은 MBC 통합 신인왕 출신이기도 했다. 맹주 조이 올리브에 도전하기 위한 결정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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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9월 8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당시 세인들은 근세하지만 손오공의 우세를 점치고 있었다. 17연승(3KO)의 유명우와 21승(9KO) 1패인 손오공의 전적에서 보듯 펀치력과 국제경기 경험에서 앞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길고 짧은 것은 재봐야 아는 법.

운명을 가르는 비무개시 공이 올린다. 양웅은 1회, 약간의 간보는 타임이 지니자 탐색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온 몸에 운기를 끌어 올려 격렬하게 부딪친다. 손오공의 묵직한 룽 훅과 유명우의 짧은 훅 공세는 흡사 창과 검의 대결 같았다.

2회, 손오공에 비해 수비력이 탄탄한 유명우가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수비가 허술한 손오공은 속사포 같은 상대의 공격을 온 몸으로 받고 있었다. 일방적 공세에 주심은 스텐딩 다운을 선언, 카운트를 샌다. 다시 비무가 재개 되지만 유명우는 공세를 멈추지 않는다. 두 번째 스텐딩 다운, 이때 그대로 두었다면 비무는 2회에 종지부를 찍었을지도 모른다. 공이 저승으로 가는 손오공을 구제해 준다.

3회부터 6회까지는 혈투 그 자체였다. 구름처럼 운집한 세인들은 두 자객의 투혼에 아낌없는 갈채를 보낸다. 하지만 냉정하게 비무를 들여다보면 유명우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손오공은 상대의 공격에 안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공격 일변도에 치중한 나머지 무수한 펀치를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물론 때론 한두 차례 상대에게 손오공의 강한 펀치가 적중되기도 했지만 수비가 좋은 유명우에겐 결정적인 타격을 주기엔 역부족이었다.

7회, 모든 것이 끝난다. 판정으로 가선 자신의 불리함을 안 손오공은 오로지 동귀어진(同歸於盡)의 각오로 공격 일변도로 간다. 유명우는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타깃이 드러난 상대에게 전설의 무공 ‘소나기 펀치’를 난사한다. 그의 주먹은 안면 몸통 할 것 없이 사정없이 적중한다. 결정타는 보디 블루우 두 방이었다. 주저앉은 손오공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주심은 카운트아웃을 선언한다. 수비력이 승패를 가른 한 판이었다.

패한 손오공은 충격의 여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세 번의 승리와 세 번의 패배를 더하고 링을 뒤로 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그 후 2000년대 초반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해 그의 불꽃같은 파이팅을 사랑한 세인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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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2월 8일 서울 문화체육관, WBA 주니어 플라이급 세계타이틀 매치.

상대는 미국의 조이 올리브. 그는 당시 36승(11KO) 4패의 전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자신의 2차 방어전이었다. 유명우 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조이 올리브는 주니어 플라이급에선 꽤 장신인 176센티미터였다. 유명우와는 13센티미터 정도 차이가 났다. 올리브는 긴 리치를 이용해 전형적인 아웃복싱을 구사하는 타이프였다.

경기 중반까지 챔피언의 아웃복싱에 말려 승기를 잡지 못하던 유명우에게 당시 유명한 복싱 해설가 한보영씨는 광고 나가는 틈을 이용해 유명우에게 빠른 잽을 이용해 포인트를 만회하라는 충고를 한다. 결국 유명우는 15라운드 2대1(148:142, 143:145, 146:141) 판정승으로 지존의 반열에 오르며 전설의 서막을 알린다.

1986년 3월 9일, 맹주 유명우는 대전 충무 체육관에서 푸에르 토리코의 강타자 호세 데 헤수스와 1차 방어전을 치른다. 도전자는 당시 16승(13KO) 2패 1무의 전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15회 막판까지 가는 접전이었지만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1차 관문을 통과한다. 헤수스는 2년 뒤 다시 한 번 유명우에게 도전장을 내밀지만 판정으로 패한다. 훗날 그는 WBO 챔프에 오른다.

2차 방어 상대는 일본의 키유나 토모히로, 그는 15승(7KO) 1패의 전적으로 야심차게 유명우에게 도전장을 내밀지만 전설의 신공 소나기 펀치를 견디지 못하고 12회에 사각의 캔버스에 나뒹군다. 이어 그해 11월 30일 아르헨티나의 기교파 자객 마리오 알베르토 데마르코를 3:0 판정으로 물리치고 3차 방어에 성공한다.

1987년에 들어 유명우는 세 차례에 걸쳐 살수들의 도전에 응한다. 13승(6KO)1패의 에듀아드로 투논를 1회 KO로 침몰시키고 또 27승(12KO) 2패 3무의 메네틱토 뮤리로를 15회 TKO로 가라앉히고 5차 방어의 벽을 넘는다. 이어 로돌포 블랑코 마저 8회에 패대기치며 6차 방어전를 마무리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날이 밝았다. 위대한 맹주 유명우는 거침없이 진군한다. 그는 윌리 살라자, 호세 데 헤수스를 차례로 판정으로 제압한 후 팟 오브타나캄을 6회, 우딘 바하루딘을 7회에 각각 TKO로 요절내고 10차 방어를 마무리한다.

열여덟 살의 소년에서 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유명우는 절대지존의 위엄마저 더해져 세인들의 추앙은 날이 갈수록 깊어 갔다.

1989년도에 들어 지존 유명우는 코미야마 카츠미를 10회 TKO로 날려 버린다. 또 3차 방어전에서 겨룬 바 있는 마리오 알베르토 데마르코를 3:0 압도적인 점수 차로 돌려보내고 이어 타이코 캔분 마저 7회 TKO로 작살낸다.

1990년 정월 14일, 일본의 살수 토쿠시마 히사시를 7회 TKO로 내동댕이치고 14차 방어전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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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4월 29일, 20전승(14KO)에 빛나는 베네수엘라의 특급 살수 레오 가메즈가 타도 유명우라는 반란의 기치를 높게 들고 서울로 입성한다. 처절한 난타전 끝에 2:1 판정으로 힘겹게 수성한다. 하지만 가메즈측은 판정에 대한 억울함을 제소, 재시합이 6개월 후 성사 되지만 지존 유명우에게 1차전과 달리 압도적인 점수 차로 패배, 16차 방어전의 제물로 사라진다. 훗날 가메즈는 김용강에게도 세계타이틀전에서 패하기도 하지만 결국 지존의 반열에 오른다.

1991년 4월 28일, 18승(10KO) 2패의 태국의 강타자 카이콘 탐프타이가 허세를 부리며 대들지만 유명우는 10회에 호되게 꾸짖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17차 방어의 장벽마저 넘는다. 36연승(14KO) 파죽지세 그 차체였다.

전승으로 20차 방어전을 끝으로 은거 하겠다는 위대한 지존 유명우에게 어둠이 짙어 오고 있었다. 어둠의 실체는 섬나라 자객 이오카 히로시였다. 18승(9KO) 2패 1무의 전적에 두 번의 세계도전 실패를 경험한 그는 세 번째 도전장을 유명우에게 내밀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자국 전설의 무사 쿠시겐 요코와 버금가는 백년 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귀재라고 떠벌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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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17일, 일본 오사카 체육관. 유명우로선 생애 첫 원정 시합이었다. 일진일퇴를 거듭한 비무는 2대1(115:113, 117:112, 113:115) 판정으로 유명우가 패하고 만다. 이날 시합은 이오카측에서 유명우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한 흔적이 비무 도중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렇지만 서로가 확실하게 우세했다고 단언 할 수 없었지만 홈 텃세가 결국 승패를 가른 경기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18차 방어전에서 주저앉은 맹주 유명우는 특유의 근성으로 다시 일어서 리턴 매치를 위해 맹렬히 무공 수련에 전념한다. 야인으로 돌아가더라도 잃어버린 자존심과 명예는 회복하고 싶었다.

11개월 지난 1992년 11월 18일 일본 오사카 체육관, 그 동안 이오카는 두 번의 판정승으로 2차 방어전을 무사히 치른 상태였다.

복수의 칼날을 갈아 온 유명우는 사나웠다. 1회부터 자신이 지금까지 수련한 모든 무공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확연하게 지난번 비무와는 달랐다. 이오카는 안면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맞았다.

양자가 서로 물러섬이 없이 난타전을 전개하다 마지막 라운드가 끝났다. 이오카는 떡나발이 된 얼굴로 자신의 승리를 장담했지만 말도 안 되는 허세였다. 아무리 적지지만 부심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결과는 유명우의 2:0(112:117, 111:119, 114:114) 판정승이었다. 11개월 만에 잘못 맞춰진 것을 실력으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1993년 7월 25일, 유명우는 한 차례 방어전을 치른다. 상대는 일본의 호소노 유이치, 지존의 맹공에 부심들은 만장일치로 유명우의 손을 들어 주었다. 압도적인 점수 차였다.

비무가 끝난 후 위대한 지존 유명우는 미련 없이 파란만장했던 강호에서 빠져 나와 야인으로 돌아간다.

은거 후 그는 예식장, 설렁탕 집, 오리고기 집 등을 경영하였으며 사업으로 생긴 수입으로 복싱계를 지원하고 있고 최근에는 스포츠채널에서 복싱해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유명우는 현역 시절인 1988년 3억8000만원의 대전료를 받고 국내 프로복서 중 최고의 소득을 올렸다.

당시 연 2억 원 이상의 소득이 있었던 그였지만 늘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부친이 정년퇴직을 한 후에야 자가용을 구입했다. 지존의 자리에 오른 후나 전이나 성실함과 철저한 자기관리를 바탕으로 18번의 방어전을 치르며 약 6년간 정상의 자리를 굳게 지켜냈다. 그러나 91년에 이뤄진 첫 해외 원정 방어전이었던 이오카 히로키에게 석연찮은 판정으로 타이틀을 빼앗겼다. 20차 방어전을 끝으로 무패 상태에서 명예롭게 은퇴하겠다던 그의 꿈은 무너졌지만 그가 세운 기록 36연승과 17차 방어는 아직도 세인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혹자는 유명우의 업적을 깎아내기 위해 국내에서만 타이틀을 치른 그를 ‘안방마님’이라 했고 장정구와 달리 강자와는 붙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가 걸어 온 위대한 발자국은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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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구와 더불어 80년대 한국 복싱을 양분했던 ‘작은 들소’ 그리고 ‘소나가 펀치’의 대명사 유명우, 지칠 줄 모르는 강한 체력과 빈틈없는 디펜스, 그리고 쉴 새 없이 퍼붓는 소나기 펀치. 이 모든 것을 세인들이 그리워한다. 2013년, 유명우는 장정구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위대한 전사들의 집합체인 국제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생애통산전적  39전 38승(14KO) 1패 

거제뉴스와이드 (geojenewswid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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