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 위의 도살자' 마빈 헤글러

'링 위의 도살자' 마빈 헤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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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세계챔피언 도전권을 잡지 못하고 강호를 전전하고 있는 헤글러를 보다 못해 당시 헤비급 천하를 손에 쥐고 있던 조 프레이저가 헤글러를 찾았다.

“당신에게 기회가 오지 않는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당신은 흑인이다. 둘째, 당신은 사우스포(왼손잡이)다. 그리고 셋째, 당신은 너무 강하다.”

강호에 몸을 맡긴지 어언 6년의 세월, 무수한 적수들을 쓰러뜨리고 오로지 천하제일의 자리를 노리고 있지만 헤글러에겐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는다. 공허한 한숨만이 허공만 맴돌 뿐이었다.

마빈 헤글러는 1954년 5월 23일 미국 뉴저지주 뉴아크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뉴아크는 뉴욕의 브라운 빌과 더불어 미국에서 손꼽히는 빈민가였다.
비록 가난했지만 온화하면서 언제나 부지런하고 성실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장남 헤글러는 정이 넘치는 따뜻한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헤글러의 어머니는 헤글러가 철이 들 무렵 사내가 꼭 지켜야 할 지침 몇 가지를 내려 준다. 남을 항상 존중하고 이유 없이 남에게 상처를 주지 말 것, 절대 먼저 싸움을 걸지 말 것, 단 정당하다고 본인이 생각할 때는 절대 물러서지 말 것 등이었다.

헤글러는 그런 어머니를 존경하고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 헤글러는 아파트 담벼락에 붙어 비에 젖어 너덜거리는 한 장의 포스터를 보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던 프로이드 패터슨의 헤비급 타이틀매치 포스트였다. 이 포스트 한 장이 헤글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된다.

1970년 헤글러가 16살이 되던 해 그는 가족들과 함께 매사추세츠 브록턴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그리고 그해 가을 그는 본격적으로 복싱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 맨 처음 그가 찾아 간 곳은 이탈리아계 형제가 운영하고 있는 페트로넬리라는 동네의 허름한 체육관이었다.

입관초기에는 백인에게 복싱지도를 받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열정과 성의를 다해 지도하는 페트로넬리의 패드와 구디 형제의 진심을 알고 난 뒤부터는 전적으로 그들을 신뢰하고 따랐다. 그리하여 세 사람의 인연은 헤글러가 은퇴하는 1987년 까지 이어지게 된다. 수많은 프로모터에서의 유혹도 뿌리치고 헤글러는 두 형제와 자신의 전 복싱인생을 함께 한다. 헤글러 다운 의리와 인격이었다.

1971년 헤글러는 아마추어로 강호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2년 후 헤글러는 매사추세츠 로웰에서 열린 주(州) 골든글러브 대회에 출전하여 연전연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목에 걸며 그 대회 최우수선수상 까지 거머쥐게 된다. 이 시합 후 자식이 매 맞는 직업인 복싱선수 생활을 한사코 반대했던 어머니가 마음을 돌려 헤글러의 복싱선수로서의 앞날을 축복해 준다.

177센티의 키에 단단한 몸매, 강인한 인상을 뒷받침하는 박박 깎은 머리 게다가 천부적으로 타고 난 유연함, 프로 생애 단 한 번의 다운도 허용하지 않은 무쇠와도 같은 맷집, 남들 보다 2배나 더 노력하는 성실함 이 모든 것이 위대한 마빈 헤글러의 자산이었다.

골든글러버 우승 이후 헤글러는 전미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또 한 번 우승을 한 후 1973년 5월 프로로 전향한다.

프로 데뷔전에서 테리 라이언을 2회 KO로 제압한다. 페트로넬리 체육관의 패트와 구디 형제는 파이트머니 50달러를 헤글러에게 전부 주며 우리들의 여정에 이것은 작은 시작에 불과하다며 세계챔피언을 향해 서로 노력하자고 다짐한다.

1974년 11월 16일 까지 헤글러는 17연승(14KO)으로 순조로운 항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해 11월 26일 뮌헨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슈거레이 쉴즈와의 경기에서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고도 텃세에 의해 무승부를 기록하게 된다.

이 후 헤글러는 1975년 12월 까지 8연승(5KO)을 수확한다. 그러나 그에게 또 다시 텃세 판정의 시련이 찾아온다. 그 다음해 3번의 시합 중 2번의 패배를 맞본다. 보비 와츠와 윌리 모어에게 이겨 놓고도 편파판정으로 패배를 기록하게 된다. 헤글러는 스포츠가 이렇게 까지 더러워진데 회의감을 느껴 복싱을 그만 둘까를 고심하던 그를 패트와 구디 형제가 다시 일으켜 세운다. 훗날 헤글러는 간악한(?) 그 둘을 링에 다시 세워 통쾌한 KO로 복수한다.

헤글러는 주로 보스턴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는데 당시 뉴욕을 중심으로 같은 동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보스턴과 필라델피아는 지역감정이 특히 심한 곳이었다. 헤글러는 이 지역감정의 희생양이 된 것이었다.

심기일전한 헤글러는 두 번의 패배를 디딤돌을 삼아 한층 성숙된 모습으로 1978년 3월 미들급 세계랭커에 진입 할 때까지 파죽의 12연승(10KO)을 달린다.

강력한 통치자 카를로스 몬존이 떠난 미들급은 군웅할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몬존이 반납한 타이틀은 로드리고 발데스를 거쳐 우고 파스토 코로에게 왕관이 넘겨져 있었다. 헤글러는 무공이 출중한 고수였으나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돈 킹이나 봅 애럽 같은 거물급 프로모터에 소속되어 있었더라면 벌써 천하를 호령하는 맹주가 되어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헤글러는 데뷔시절부터 자신의 시합을 주선해 온 늙은 프로모터 립 바렌치와의 의리를 지키고 있었다.

1978년 4월부터 그 다음해 6월까지 8연승을 달린다. 그중 6명은 마지막 라운드 공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링 바닥에 뒹굴어야 했다. 특히 텃세로 무승부를 이끌어 내 강호의 진리를 땅바닥에 떨어뜨린 슈거 레이 쉴즈를 단 80초 만에 링 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미들급 세계랭킹 1위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가 연전연승 할수록 세계타이틀은 점차 그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챔피언 우고 파스토 코로는 너무도 강한 헤글러와의 시합을 노골적으로 피해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갔다. 그래도 그는 강호의 세계는 오로지 강한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진리를 믿으며 차곡차곡 승수를 쌓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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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1월 30일 긴 세월 한 자루의 묵검으로 천하를 주유하던 헤글러에게 세계도전의 기회가 찾아온다. 상대는 불독 비토 안투페르모, 그는 미꾸라지 우고 파스토 코로를 그의 별명 불독답게 끝끝내 물고 늘어져 15회 판정승으로 새로운 왕좌에 등극한 맹주였다.

라스베가스 시저스 팰리스호텔 특설링 WBA, WBC 미들급 통합 세계타이틀매치, 무관의 제왕으로 강호를 전전한지 실로 6여년의 길고도 긴 세월, 그때까지 헤글러의 전적은 49전 46승(37KO) 2패 1무, 챔피언 안투페르모는 48전 45승(20KO) 3패 1무, 헤글러가 세계랭킹 1위를 계속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이 기회도 없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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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전 도박사들은 헤글러의 압도적인 우세를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 날 헤글러와 안투페르모의 시합은 메인 시합이 아니었다. 절정의 인기가도를 달리는 슈거레이 레너드와 푸에르토리코의 천재복서 윌프레도 베니터즈와의 WBC 웰터급 세계타이틀 매치의 오픈 시합이었다.

15라운드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리고 운집한 수많은 관중들은 새로운 미들급 챔피언 탄생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무승부, 3명의 부심 중 한명은 안투페르모 우세 또 다른 부심은 헤글러 우세 마지막 한명은 무승부였다.

헤글러는 또 한 번 절망했다. 그리고 그는 라커룸에 앉아 결심한다. “절대 심판을 믿지 않겠다. 이 끝없는 편견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오로지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뿐이다.”

그때 헤글러의 대전료가 4만 달러, 레너드가 100만 달러였다. 당시 두 선수의 지명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억울하지만 무승부를 기록한 덕에 헤글러의 랭킹1위는 유지되고 있었다. 그는 언제까지 절망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링에 오른다. 3번의 승수를 쌓아 가는 동안에 미들급의 왕관은 안투페르모를 떠나 알란 민터를 따라 바다 건너 영국에 가 있었다.

1980년 9월 27일, 헤글러에게 다시 한 번 세계도전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는 대서양을 건너 적지 영국으로 상륙한다. 당시 민터는 안투페르모를 15회 판정으로 왕좌를 탈취 한 후 1차 방어를 안투페르모와의 리턴 매치에서 8회 KO로 눕히고 헤글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민터는 44전 38승(22KO) 6패의 전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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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 민터는 웸블리구장에 모인 광적인 홈팬들의 성원을 등에 업고 경기에 나섰지만 그는 헤글러의 적수가 되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랐다. 3회 주심이 경기를 중지시킨다. 그대로 두다간 민터의 이목구비가 바뀔 판이었다. 헤글러의 승리가 선언 되자 그는 링 위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환호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분노한 영국 관중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링 위에 투척한다. 헤글러는 경찰의 경호를 받고 서야 영국을 탈출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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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4월 15일 라스베가스 시저스 팰리스호텔 특설 링으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시합 전 헤글러는 “나는 쿠에바스나 두란이 아니다. 바다에서 놀던 고기가 개천에서 노는 물고기와의 차이를 증명해 보이겠다.” 며 전의를 불태웠다.
시합을 알리는 공이 울리자 헤글러는 용수철처럼 튀어 나간다. 시합 중반에 승부를 걸리라는 예상을 비웃듯이 초반부터 두 선수는 난타전을 전개한다. 입추에 여지가 없을 정도로 운집한 관중은 양자의 파이팅에 열광적인 환호를 보낸다. 헌즈가 여러 차례 카운터를 챔피언의 안면에 명중시켰지만 헤글러는 거대한 태산과도 같이 흔들림 없는 맷집을 자랑한다.

2회에 접어들자마자 헌즈의 송곳 같은 스트레이트가 헤글러의 눈자위를 찢어 놓는다. 피를 본 헤글러는 살기등등한 위세로 도전자를 거세게 몰아 부친다. 라운드가 종료되어 코너를 찾아가는 헌즈의 다리가 심하게 풀려있었다.

3회 초반 헤글러가 찢어진 눈자위를 링 닥터의 검진을 받고 시합이 속개되자 도전자를 향해 미친 듯이 덤벼든다. 좌우연타에 이은 라이트훅이 헌즈의 턱에 그림처럼 꽂힌다. 마치 연체동물처럼 스르르 주저앉자마자 천정을 향해 허옇게 눈을 뜨고 있는 모습은 마치 전신마취 환자와도 같았다.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킨다.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헌즈는 헤글러에겐 너무나 연약했다.

헌즈와의 초반 KO승은 맹주 헤글러를 중량급의 전설 카를로스 몬존, 슈거레이 로빈슨과 맞먹는 슈퍼스타로 격상된다. 이제 헤글러의 존재는 신성불가침 그 자체였다.

1년 동안 그 누구도 감히 비무를 청할 수 없는 절대자 헤글러에게 우간다에서 날아 온 야수 존 무가비가 겁도 없이 도전장을 내민다.

1986년 3월 10일, 26전승(26KO)을 자랑하는 아프리카의 맹수 무가비와의 시작 공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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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초봄 둘은 맞붙었다. 지구상의 수많은 군웅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그들은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12라운드 내내 왜 그들이 천하제일의 고수인지를 증명한다. 결과는 대형 프로모터의 횡포로 레너드의 승리로 끝나지만 헤글러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레너드와의 세기의 시합이 끝난 며칠 후 그는 홀연히 은퇴를 선언한다. 그의 좌우에는 그와 복싱선수 평생을 함께한 페트로넬리 체육관의 패트와 구디 형제와 늙은 프로모터 립 바렌치가 나란히 서 있었다.

무관의 제왕으로 강호를 떠돌다 천신만고 끝에 도전자격을 얻어 집권한 후 8년간 천하를 호령하다 마지막까지 텃세에 울어야 했던 전설 마빈 마브러스 헤글러, 그는 사각의 정글에서 진정한 강함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실천한 위대한 전설이다. 그리고 그는 가야 할 때를 알고 미련 없이 떠나가는 아름다운 저녁놀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훗날 헤글러는 영화계로 진출, 직접제작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2번의 실패로 많은 아픔을 겪기도 했다.

빛나는 대머리, 강인한 인상, 숨 쉴 틈 없이 몰아 부치는 강렬함 이 모든 것을 팬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이다.

생애 통산전적  67전 62승(52KO) 2무 3패

거제뉴스와이드 (geojenewswid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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