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이 남기고 간 흔적

공룡이 남기고 간 흔적


김영삼 정권 말기 IMF의 여파로 전 국민이 패닉에 빠져 있었다. 다행히 거제는 조선업의 호황으로 타 지역 보다는 아픔이 덜했다.

하지만 필자가 소속된 회사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자금난에 시달려 하루하루 인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직원 모두가 이대로 가면 회사가 언제 문을 닫을지 불안한 심정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일을 급한 놈 지푸라기 잡은 심정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아침, 화장실에 갔던 여직원이 고요한 적막을 깨고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여직원의 얼굴에는 차마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얼굴에는 공포의 흔적이 어리어 있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고 먼저 필자의 선임이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로부터 수십 초가 지난 후 선임은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 나와 필자보고 당신이 가보라는 식으로 동네 개 부리듯 고개를 허공으로 쳐든다.

필자는 두려움 반 의구심 반으로 조심스레 화장실로 들어가 현장을 확인했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필자는 두 눈을 의심했다. 그것은 인간이 남긴 흔적이 아니었다. 50여 센티미터 좌변기에 길게 드러누워 있는 배설물은 거대한 구조물을 연상케 했다. 그것도 작은 잔해는 없고 그것 딱 하나만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에 존재한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있었다.

검황색에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는 배설물은 인간이 남긴 흔적 이라기보다는 공룡이 남긴 잔여물에 가까웠다.

하필 그날따라 남자화장실 변기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누군가가 이른 아침 여자화장실에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러 놓은 것이었다.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니 나란히 섰던 직원들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입만 쩍 벌리고 서 있었다.

필자는 직원들에게 자리에 돌아가 업무를 보라고 하고 변기 레버를 당겨 녀석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러나 녀석을 없애기에는 수압이 너무나 연약했다. 녀석은 태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열이 뻗친 필자는 수차례에 걸쳐 레버를 당겼지만 헛수고였다. 그때 필자의 선임이 씩씩거리며 물통에 물을 가득 담고 왔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한방에 보내겠다는 자신감으로 흡사 태산을 무너트릴 기세로 물을 한꺼번에 쏟아 부었다.

분명 효과는 있었다. 다량의 물에 일격을 당한 녀석은 느릿하게 좌변기 마당에서 미끄러져 오수관로로 들어가는 입구에 내려와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필자의 선임은 비지땀을 흘리며 물통으로 계속 물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녀석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전략을 쓰기로 했다. 녀석을 막대기로 잘게 쪼개 흘러 보내기로 했다. 그로부터 5분이 지나자 잘게 분해된 녀석은 부유물처럼 수면위에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필자의 선임은 흐르는 땀을 훔치며 녀석에게 피니쉬블로우를 먹였다. ‘꼬르륵’ 소리와 함께 녀석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갔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때 누가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심증은 가지만 아직도 그 시기에 현장에 있었던 직원들은 서로에게 묻지 않은 것은 불문율로 되어 있다. 그 만큼 녀석은 지금 생각해도 인간이 아닌 공룡이 남긴 흔적이 분명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닥쳐 올 앞날에 대해 쉽게 예측조차 할 수 없었던 그때, 배고프고 고달프지만 거대한 배설물로 인해 한참이고 웃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이 때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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