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파스 대초원(大草原)의 영웅 카를로스 몬존
“아득한 바다 저 멀리 산 넘고 물결 건너서 나는 찾아 가리 외로운 길 삼만리 …”. 어린 마르코가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엄마를 찾아 가는 만화 영화를 보며 자란 필자에게는 아르헨티나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비운의 여인 에비타, 대통령인 남편을 보좌하며 평생을 노동자를 위해 봉사하다 짧은 생을 마감한 에바 페론의 일대기는 아직도 가슴속에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카를로스 몬존의 조국 아르헨티나는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받아 들여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부국이었다. 대한민국이 1960년대 1인당 국민소득 백 불에 허덕일 때 아르헨티나는 5,000불 이상의 소득으로 윤택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하고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스포츠 분야에서는 중남미 최고의 강국이다. 특히 선진국 형 스포츠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스타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세계 복싱사에 1970년대를 누볐던 미들급의 전설 카를로스 몬존은 전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지금도 복싱 전문가들은 마빈 헤글러, 슈거레이 로빈슨과 더불어 카를로스 몬존을 역대 미들급 최고의 선수로 꼽는 데는 주저하지 않는다.
장차 미들급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서로 남게 될 카를로스 몬존은 1942년 8월 7일 아르헨티나의 중부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 상공업의 중심지인 산타페에서 태어난다.
그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 1963년 2월 6일 라몬 몬테네그로를 2회에 내려 앉히고 험난한 강호에 첫발을 내딛는다.
1966년 9월 3일, 조지 호세 페르난데스를 12회 판정으로 제압하고 아르헨티나 미들급 챔피언에 등극할 때 까지 그는 그저 그런 평범한 무사였다. 그때까지 몬존의 전적은 40전 30승(19KO) 6무 3패 1노게임을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그는 패배를 모르는 전사로 거듭난다. 1970년 이탈리아의 영웅 니노 벤베누티에게 도전하기 전까지 그는 3번의 무승부를 포함 파죽의 40연승(23KO)을 달린다.
지금도 몬존의 라이트 스트레이트 하나만은 역대 복서 중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 그는 80전을 싸워오며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자신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로 스스로 개발한 것이다.
강호에 발들인지 7년의 세월, 숫한 적들을 제압하고 오로지 천하제일인자가 되기 위해 한길만 걸어오는 동안 그도 이제 약관의 나이에서 서른 살을 바라보는 백전노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에게 천하제패의 기회가 찾아온다. 상대는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니노 벤베누티. 벤베누티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선수다. 대한민국의 초대 세계챔피언 김기수에게 맹주의 자리를 내어 준 장본인 이기도하다.
벤베누티는 산드로 마징기에게 타이틀을 획득한 후 김기수에게 패하고 에밀레 그리피스로부터 왕좌를 탈취하지만 리턴매치에서 석패한 후 다시 돈 풀머에 도전 세 번째 맹주에 자리에 오른 후 4차 방어 상대로 카를로스 몬존을 지목하였다.
1970년 11월 7일 이탈리아 로마, WBA/WBC 미들급 통합 세계타이틀 매치.
당시 챔피언 니노 벤베누티는 87전 82승(25KO) 1무 4패의 전적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에 맞선 도전자 카를로스 몬존은 80전 67승(42KO) 9무 3패 1노게임의 전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양웅(兩雄)은 공통점이 있었다. 양 선수 모두 늘씬한 키에 영화배우 뺨치는 얼굴에다 화려한 무공으로 세인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었다.
뭇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호남아(好男兒)들의 격돌은 12회전 까지 가는 혈전 끝에 몬존의 레프리 스톱(TKO)승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천하제일인 자리에 오른 몬존은 이때부터 6년 9개월간 철권통치로 자신에게 항거하는 무수한 자객들을 도륙한다.
맹주에 오른 몬존은 세 차례 논타이틀전에서 나란히 2회에 박살내고 1차 방어 준비를 끝낸다. 상대는 와신상담(臥薪嘗膽),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며 4개월간 시공을 넘어 달려 온 니노 벤베누티였다.
하지만 결과는 전 시합보다 더 비참하게 3회에 무너지고 만다. 1회부터 난타전으로 일관하다 2회 첫 번째 다운을 허용한 후 3회 들어 또 다시 다운을 당하자 코너에서 타올을 던진다. 벤베누티는 타올을 던진 코치진을 향해 링 위에 있는 타올을 발로 차내며 분노하지만 이미 시합의 결과는 돌이킬 수 없었다.
첫 번째 방어전을 가볍게 넘긴 몬존은 2차 방어 상대로 전 챔피언 에밀레 그리피스를 홈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불러 종료직전 14회에 박살내며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한다.
쾌남아 몬존은 거칠 것 없이 무풍지대를 달린다. 미국의 기교파 108전에 빛나는 백전노장 대니 무어를 이탈리아 로마에서 5회에 패대기치고 프랑스의 강타자 진 크라우드 바우티어를 13회에까지 가는 접전 끝에 전가(傳家)의 보도(寶刀) 라이트 스트레이트로 제압한다. 이어 몬존은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날아가 톰 보그스를 5회에 내려앉히고 그해 11월 베니 브리스코를 최종라운드까지 가서 심판전원 일치 판정으로 제압하고 6차 방어의 벽을 넘는다. 1972년도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6차 방어가 끝난 후 세인들은 그를 가리켜 팜파스(남미 대륙을 가로 지르는 대초원)의 영웅이라 불렸다.
절대맹주 몬존의 강력함에 미들급은 전란 없는 태평성대를 누린다. 하지만 통치자 몬존은 거만한 권력자는 아니었다. 6차 방어 후 자격의 습격 없이 6개월이 지나자 자신의 녹슬지 않은 자신의 무공을 이탈리아 로마에서 논타이틀전으로 로이 대일을 가볍게 5회에 날려버리고 운기조식에 들어간다.
한 달 뒤 복수의 칼날을 갈아 온 에밀레 그리피스가 진검승부를 요청해 오자 몬존은 망설임 없이 멕시코로 날아가 혈투 끝에 15회 판정으로 제압하고 7차 방어를 마친다.
1973년 9월 29일, 7차 방어전의 내상이 채 완치되기 전 4차 방어전에서 무릎 꿇은 진 크라우드 바우티어가 몬존을 프랑스 파리로 초대한다. 몬존은 망설임 없이 프랑스로 날아가 또 다시 민란을 제압하고 개선한다.
몬존에게 또 하나의 위대한 전설이 도전장을 내민다. 그는 웰터급의 맹주 호세 나폴레스였다. 나폴레스는 1969년 웰터급 통합 타이틀을 탈취한 후 12차 방어에 성공한 절세고수였다.
1974년 2월 9일, 도전자 나폴레스는 82전 77승(44KO) 5패의 전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치려진 몬존의 9차 방어전은 그들이 왜 천하일인자임을 증명하는 자리였다. 비무는 초반부터 혈전을 거듭하다 6회 몬존쪽으로 저울의 추가 기운다. 그렇게 몬존은 또 하나의 거대한 산을 넘자 이제는 미들급은 몬존의 성역으로 굳어 가고 있었다.
이후 몬존은 토니 문디네를 홈 링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불러 들여 5회에 날려버리고 그 다음해 토니 리카타를 미국 뉴욕으로 원정 가서 10회에 주저앉히고 이어 그리턴 토나를 파리에서 5회에 요절내고 12차 방어의 관문을 통과한다.
강력함에 세월의 위엄마저 더해진 몬존은 이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군주였다. 하지만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은 법. 1976년 6월 26일 콜롬비아의 강타자 로드리고 발데스가 몬존을 겁도 없이 멕시코로 초대한다. 분노한 몬존은 발데스의 반란을 15회까지 가는 사투 끝에 신승한다.
또 다시 미들급에 요순시대가 찾아온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13개월이 지날 쯤 로드리고 발데스가 또 다시 ‘타도 몬존’을 외치며 반란의 기치를 높이 든다.
몬존은 병사들을 이끌고 멕시코 원정을 떠난다. 전투는 마지막까지 가는 혈전 끝에 발데스의 반란을 또 다시 제압한다. 미들급 역사상 전무한 14방어의 금자탑을 쌓는다. 그때 그의 나이 복서로서는 노쇠한 서른여섯이었다.
몬존은 심신이 지쳐 가고 있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무도 싫증나고 그렇다고 강력한 도전자도 딱히 보이지 않았다.
절대맹주 몬존은 고독에 빠진다. 1977년 늦은 가을 노을이 짙어 갈 무렵 몬존은 돌연 14년간 파란만장 했던 사각의 캔버스를 뒤로 하고 은퇴를 선언한다.
강력한 통치자 몬존의 명예로운 은퇴 후 미들급은 군웅할거의 시대로 돌입한다. 아직도 몬존의 은퇴 이유에 대해 추측이 난무하다.
미들급의 전설 카를로스 몬존, 그는 7년간의 통치기간 중 유럽, 북미, 미국을 오가며 숱한 자객들을 도륙하였으며 지금도 14차 방어는 미들급의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호남아 스타일에 미들급의 맹주라는 그 하나만으로 여성 팬들에게 뭇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따라서 그의 식을 줄 모르는 인기는 당시 파파라치들의 표적이 될 만큼 숱한 스캔들을 양산하였다. 유럽과 남미를 오가며 1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그 인연으로 인해 영화배우 수잔나 히메네스와 결혼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두 번째 결혼과 부인 알리시아 무니즈와도 몬존의 과도한 폭력 때문에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1988년, 그의 아내가 발코니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처음에는 자살로 추정되었지만 부검 도중에 목 졸린 흔적과 구타의 상흔이 발견되어 살해범이 몬존으로 밝혀져 결국 그는 1989년 11년형을 언도받고 영어의 몸이 된다. 그로부터 6년 후 1995년, 특별감호 휴가를 받아 가족의 품으로 가던 도중 자동차 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훗날 그의 죽음은 자살로 추정되기도 하였으며 비록 살인죄라는 굴레를 쓰고 불명예스럽게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아르헨티나 팬들이 그를 추억하며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2001년 아르헨티나 법정은 카를로스 몬존의 영령 앞에 자유석방을 선언하였다.
‘카를로스 몬존’ 그는 미들급의 부동의 제왕이었다. 뭇 여성들을 사로잡은 호남아의 외모와 달리 살인적인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가진 절세고수를 팬들은 지금도 그를 그리워한다.
▲생애 통산 전적 100전 87승(58KO) 9무 3패 1노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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