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세계챔피언 김기수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챔피언 김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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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북청군은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챔피언 김기수의 고향이다. 북청군은 김기수의 인생여정 만큼이나 우여곡절을 간직하고 있는 고장이다.

북청은 원래 옥저의 땅이었고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던 이곳은 그 뒤 여진족의 거주지가 되었다가 1372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청주부가 되어 함흥부에 속했으나 충청도 청주목과 이름이 같아 1417년 다시 북청으로 고쳤으며,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을 때 이곳에서 이시애의 반군이 크게 패했다. 1896년에 격하되어 함흥부에 속했다가 다시 북청군이 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북청물장수는 한국전쟁을 치른 후 피난민들이 대거 서울로 유입되면서 오폐수처리 시설 부족은 수질오염을 부르고 이에 식수는 물장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척박에 땅에서 살아 온 북청사람들은 한강물을 퍼 날라 그 수입으로 민생고를 해결하였고 또한 자녀들을 교육하였다. 이는 그들의 끈기와 생명력을 보여준 한 예라 할 수 있었다.

여하튼 장차 대한민국 복싱계의 영원한 이정표가 될 김기수가 1939년 9월 17일 일제강점하에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난다.

그는 타고난 개구쟁이였다. 그의 짓궂은 장난에 또래아이들은 물론이고 마을 처녀에게도 골치 덩어리였다.

그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은 이른 새벽 T52 탱크를 앞세우고 남한에 대해 전 전선에 걸쳐 기습공격을 감행한다. 이른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의 시작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생중 이었던 김기수는 어머니가 치안대원들에게 밥을 해 준 것이 빌미가 되어 반동분자로 낙인이 찍히는 바람에 가족과 함께 돛단배에 몸을 싣고 38도선을 넘는다. 전쟁은 그를 악바리로 만든다.

우여곡절 끝에 여수에 도착한 그는 생활전선으로 뛰어든다. 신문을 팔기도 했고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양담배를 팔기도 했다.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여수 여항중 2학년 때 김기수는 자신의 운명이 될 복싱을 처음 접하게 된다. 시민극장 특설링에서 벌어진 군 대항 학생선수권전이었다. 김기수는 관중들의 함성과 선수들의 투혼에 넋을 잃고 만다. 이후 그의 운명은 일직선으로 달려간다.

여수에서 하나뿐인 권투도장에 문을 두드린다. 학교를 마치면 양담배와 신문을 판 뒤 신이 뻗친 듯 체육관으로 내달린다.

그의 천재성은 금세 빛을 보기 시작한다. 타고 난 펀치력과 민첩함은 여수대표에 발탁되는 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1957년 광주에서 열린 전국학생선수권 대회에서 국가대표 선수들도 그의 적수가 되기엔 한참이나 모자랐다. 김기수의 기세는 당시 권투명문이던 서울 성북고에 진학하는 계기가 된다.

김기수는 끈질긴 북청의 아들답게 자신에게 혹독했다. 그는 북한산 십 오리 길을 매일 달렸다. 모든 운동의 기본인 튼튼한 하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교야구를 석권하고 일본으로 날아가 대한민국 야구의 매운맛을 보여 준 백인천씨를 만나 같이 뛰기도 했다.

물 만난 고기 마냥 링 위에서 김기수는 불패의 신화를 만들고 있었다. 1958년 웰터급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하면서 일본 동경 아시안 게임에 출전, 금메달을 목에 건다. 중량급으로서 한국복싱 사상 최초의 국제대회 우승이었다. 이어 대만에서 열린 동아시아선수권대회마져 석권한다. 이때까지 김기수는 파죽의 87연승을 달린다. 하지만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은 법.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김기수는 준준결승전의 벽을 넘지 못한다. 김기수 생애 최초의 패배였다. 상대는 먼 훗날 세계타이틀전에서 일전을 치를 이탈리아의 영웅 니노 벤베누티였다. 김기수 스스로도 완패를 인정한 시합이었다.

패배의 쓰라림을 맞보고 귀국한 김기수는 망설임 없이 프로라는 험난한 강호에 뛰어든다. 데뷔전에서 김기수는 정공법을 택한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라면 피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당시 아시아 중량급 전하를 한 손에 쥐고 있던 평안북도 운산 출신의 강세철을 택한다. 1961년 10월 1일, 11월 1일 한 달에 걸쳐 두 차례 비무를 가져 10회 판정과 7회 KO승으로 기분 좋게 닻을 올린다. 데뷔전이 한국 미들급타이틀매치였다.

데뷔한 그해가 저물어 가는 12월, 김기수는 당시 강타자였던 이안사노를 7회 레프리 스톱승을 거두고 일본으로 날아간다.

비무 상대를 찾지 못해 7개월 허송세월을 보내다 와타나베 마코토와 맞붙어 3회에 요절을 낸다. 이어 신조자와 사쿠지와의 시합에서 3회 버팅으로 무승부를 기록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1963년 5월 18일 김기수는 59전에 빛나는 백전노장 로베르토 페냐를 6회 기어이 캔버스에 패대기친다. 이어 강규순을 두 차례에 걸쳐 판정으로 제압한다.

김기수는 강세철과의 한국타이틀전을 포함, 동양태평양 타이틀에 도전할 때까지 7연승(4KO)을 달린다.

1965년 1월 10일 일본 동경에서 치르진 동양태평양 타이틀전에서 54전의 노장 카이주 후미오를 닭 모가지 비틀듯이 6회에 내려 앉히고 타이틀을 손에 넣는다.

타이틀을 거머쥔 김기수는 거칠 것이 없었다. 통합 WBA/WBC 세계슈퍼웰터급에 도전자로 나서기 전까지 동양타이틀 방어전을 포함, 4연승(3KO)을 수확한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남기고 간 상처는 쉬이 아물어지지 않았다. 그 시절 대한민국 국민은 하늘을 우러러 한반도 백성들에게 끝없는 시련을 주는 신을 원망했다. 36년간의 일제강점 치하에서 해방되어 장미 빛 미래의 꿈을 채 꾸기도 전, 전쟁이 발발한 것이었다. 한민족에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살아야 했다. 민중은 주린 배를 움켜지고 지긋지긋한 가난의 설움을 내자식대까지 물러주고 싶지 않았다. 죽어라 일하며 희망을 찾았다. 그곳에 악바리 김기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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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 WBA/WBC 세계슈퍼웰터급 통합타이틀 매치.

김기수의 세계타이틀매치는 국가적 행사였다. 당시 벤베누티는 파이트머니를 5만 5천 달러를 요구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때 한국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 수준임을 감안할 때 이는 지급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청와대로 부른다. “임자, 이길 자신 있어?” “각하, 젖 먹던 힘까지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파이트머니를 정부에서 지급 보증하게 된다. 지친 국민도 그랬고 대통령도 그랬고 당시 모두에겐 하면 된다는 희망이 절실한 시기였다.

김기수는 어릴 적부터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 몸을 혹사하다보니 육신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는 전선으로 가야했다. 자신도 그렇고 삶에 찌든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당시 맹주 벤베누티는 65연승(27KO)을 달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천하무적이었다. 반면 김기수는 22승(14KO) 2무승부를 기록하고 있었다. 양웅은 무패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벤베누티는 자국의 또 하나의 영웅 산드로 마징기에게 타이틀을 탈취, 쉬어 가는 의미로 비교적 약체(?)인 김기수를 2차 방어 상대로 지목한 것이었다. 사실 도박사들도 7대3으로 챔피언의 우세를 점쳤다.

6월 25일은 국민 모두에게 아픔을 상징하는 날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참관한 가운데 세인들은 김기수를 응원하기 위해 장충체육관으로 하나 둘씩 모여 구름같이 운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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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공이 울리고 도전자 김기수는 발 빠른 챔피언을 초지일관 치고 클린치하는 전법을 구사, 착실하게 포인트를 획득하여 2대1 판정으로 대망의 지존 반열에 오른다. 그의 승리에 전 국민은 열광한다. 세인들은 내일을 잊고 그 날만은 마음껏 기쁨에 취했다. 그렇게 대한민국 최초 세계챔피언 탄생 드라마는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맹주에 오른 김기수는 그해 11월 일본의 사토 겐을 서울로 불러 4회에 주저앉히고 몸을 푼 뒤 12월 17일, 83전에 빛나는 미국의 백전노장 스탄 헤링턴을 서울로 불러 15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판정으로 물리치고 1차 방어의 벽을 넘는다.

이어 그 다음해 1967년 3월과 9월에 조지 카터, 사사자키 나카오를 5회와 6회에 날려 버리고 2차 방어 준비를 끝낸다.

1967년 6월 3일 서울 동대문야구장. 2차 방어 상대는 미국의 강타자 프레디 리틀, 당시 도전자는 37승(25KO) 3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김기수는 11회 한차례 다운을 허용하며 15회까지 가는 난타전 끝에 2대1 판정으로 힘겹게2차 방어까지 마친다.

이후 그는 논타이틀전과 동양타이틀전 방어 포함하여 4번의 승리를 거둔다.

1968년 5월 26일 이탈리아, 김기수의 3차 방어전. 도전자는 이태리의 영웅 산드로 마징기, 마징기는 벤베누티에게 타이틀을 빼앗기고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당시 도전자 마징기는 54승(37KO) 3패의 전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맹주 김기수는 선전했지만 텃세 판정에 운다. 2대1 판정패였다. 프로 생애 최초의 패배였다. 그렇게 김기수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는 마징기와의 시합에서 대전료 5만 5천 달러를 받아 정부에 돌려준다. 빚을 갚은 셈이었다.

마징기에게 지존의 자리를 내어 준 6개월 후 일본 오사카에서 치르진 동양태평양 타이틀전에서 미나미 히사오에게 판정으로 타이틀을 내어 준다. 프로 생애 두 번째 패배였다.

김기수는 4개월 뒤 미나미 히사오를 서울에 불러 12회 판정으로 설욕 한 후 미련 없이 사각의 캔버스를 뒤로 하고 은퇴를 선언한다. 자식에게 패배자의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자존심이었다.

사실 김기수는 일본 킬러였다. 이는 전적에서 잘 나타나 있다. 17전 15승(9KO) 1무 1패, 일본선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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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김기수는 사업가로 변신하여 성공한다. 매 맞고 번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는 성북동에 집도 사고 후배를 위해 권투도장을 차리기도 한다. 명동에 건물도 사고 찻집도 연다. 그는 지인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각의 링은 냉정하다. 하지만 링 밖은 더욱 비정하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 버린 ‘김기수’, 그는 60년대 헐벗고 굶주린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신기루 같은 경제발전이라는 꿈을 쫒고 있을 때 그는 세인들에게 희망이었고 망망대해 항로를 비쳐주는 등대와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는 유복자이며 가난과 설움 속에 살면서 맨주먹 하나로 세계를 재패한 인간승리이기도 했다. 그의 뒤를 이어 수많은 젊은이들이 지긋지긋한 가난에 맞서기 위해 링 안으로 뛰어 들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그였기에 자식에 대한 사랑도 유별났다. 그는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이자 좋은 이웃이며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세인들은 그를 링 위의 챔피언이자 인생에서도 챔피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칭찬했다.

1997년 6월 10일, 김기수는 지병인 간암으로 전설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때 그의 나이 오십 아홉 살이었다. 살아서 주먹하나로 수많은 자객들을 물리친 그였지만 암세포와의 마지막 승부에서 그답지 않게 완패하고 만다.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북청의 아들, 대한민국의 영웅은 갔다. 사랑하던 아내와 두 아들 두 딸을 남겨 놓고.

생애 통산 전적  37전 33승(17KO) 2무 2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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