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9戰만에 천하를 재패하다.’ 일본 복싱의 영웅 ‘구시켄 요코(具志堅 用高)’

‘단 9戰만에 천하를 재패하다.’ 일본 복싱의 영웅 ‘구시켄 요코(具志堅 用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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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3월 8일 일본 오키나와, 경천동지 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WBA라이트 플라이급 절대 맹주 구시켄 요코가 두 눈에 공포가 어린 채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것도 멕시코에서 온 평범한 자객 페드로 플로레스에게 4회 이 후 일방적으로 난타 당한다. 이를 보다 못한 세컨측이 12회 타올을 던진다. 그렇게 일본 복싱의 영웅 구시켄의 신화는 페드로 플로레스의 생애 다섯 번째 KO승의 제물이 되면서 막이 내리고 있었다.

1955년 6월 26일 일본 오키나와현(沖縄県) 이시가키시(石垣市)에서 장차 일본 복싱계에 영웅으로 남을 구시켄 요코가 태어난다. 그는 류큐(琉球 : 오키나와의 옛 이름) 국왕의 시죠규(士族 : 무사)가문 출신이다.

구시켄은 이시가키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오키나와 본토에 있는 교난고교(興南高校)에 입학한다.

고교시절 복싱부에 들어가기 전에 야구부에 지망하였지만 왜소한 체구 때문에 거절당한다. 전화위복이었다. 그는 좋은 스승과 매일 반복되는 특별훈련으로 천부적으로 타고 난 전사로서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인터하이 모스키트급(라이트 플라이급이 생기기 전 체급)에서 우승을 한 후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상경한다.

구시켄은 동경 분쿄구(文京区)에 있는 다쿠쇼쿠대학(拓殖大学)에 체육특기생으로 합격하였지만 평소 그의 재능에 반해 눈여겨보고 있던 교에이 복싱짐(協栄 프로모션) 가네히라 마사키(金平正紀) 회장은 구시켄이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급기야 그는 자신의 매니저를 보내 구시켄을 납치하다시피 끌고 와서는 기어코 교에이 선수로 등록한다.

교에이 가네히라 회장은 구시켄을 가르켜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초절정 고수”라고 추켜세웠다.

구시켄는 1974년 5월 28일, 62승(50KO ‧ RSC) 3패의 화려한 아마추어 전적을 뒤로 하고 열아홉이 되던 해 꿈에 그리던 강호에 입문한다.

당시 프로엔 최경량급이 플라이급(50.8킬로그램 이하)이었다. 구시켄은 모스키트급(45킬로그램 이하)이였지만 하는 수 없이 플라이급으로 데뷔한다.

데뷔전 상대는 전일본(全日本) 플라이급 신인왕 출신 마키 고이찌였다. 구시켄은 현격한 체중차이에서 오는 핸디캡에 고전한다.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지만 이겨도 이긴 기분은 아니었다. 4개월 후 마키와 재대결을 벌이지만 또 한 번 떨떠름한 1승을 보탠다.

마키와의 졸전이후 플라이급 아래 주니어 플라이급(현재, 라이트 플라이급)이 신설된다. 이때부터 구시켄은 파죽지세로 내달린다.

1974년 12월부터 그 다음해 10월 까지 일본의 상위 랭크를 상대로 4연승(3KO)을 쓸어 담는다. 단6전만에 세계 랭킹 10위에 진입하는 순간이었다.

1976년 1월 23일 구시켄은 가나가와현(神奈川県) 가와사키시립(川崎市立) 체육관에서 동급 세계 랭킹 3위 미국의 세자르 고메즈 키와 세계왕좌 도전자 결정권을 두고 진검승부를 펼친다.

미국이 자랑하는 키는 14연승(12KO)을 자랑하는 절정고수였다. 하지만 길고 짧은 것은 재봐야 아는 법, 구시켄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무가 시작된 후 1회를 탐색으로 보낸 구시켄은 2회 다운을 빼앗은 후부터 시종일관 상대를 압도하다 7회에 키를 내려 앉힌다. 천하재패를 위한 도전권을 움켜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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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0월 10일 일본 야마나시현(山梨県) 고후시(甲府市) 야마나시카쿠앤대학(山梨学院大学) 체육관, WBA라이트 플라이급 세계타이틀캐치.

상대는 도미니카공화국이 자랑하는 ‘리틀 포먼’ 후안 안토니오 구즈만, 구즈만은 25승(15KO) 1패의 전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15KO승 중 1회에 11번의 KO승을 거둔 강타자였다. 이에 비해 구시켄은 8연승(5KO)을 달리고 있었다.

구시켄은 경기 초반부터 경쾌한 푸드웍으로 상대를 유도한다. 이에 반해 구즈만은 일발필도의 강타를 노리며 호시탐탐 구시켄을 째려보고 있었다.

도전자는 2회, 전광석화 같은 연타로 구즈만에게 첫 번째 다운을 빼앗는다. 3회, 이에 질세라 구즈만은 강력한 레프트 훅으로 응사한다. 구시켄은 로프에 몰렸지만 후속타를 허용하지 않는다. 4회, 또 다시 도전자는 챔피언을 캔버스에 패대기친다.

이후 구시켄은 철벽같은 방어와 함께 강력한 연타로 챔피언을 괴롭힌다. 7회에 들어 구시켄은 초반부터 구즈만을 로프로 몰아 쉴 새 없이 주먹을 퍼붓는다. 구즈만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세 번째 다운을 허용한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 7회 32초만의 일이었다.

오키나와 출신으로 첫 번째 천하를 재패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일본 프로복싱 사상 9전 만에 타이틀 쟁취는 최단기간 기록이었다. 시합 후 그는 인터뷰에서 “나는 이제부터 저 넓은 창공을 지배하는 ‘칸무리와시(매의 일종)’가 되어 천하 무림을 지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세인들은 그를 가리켜 ‘칸무리와시’라고 불렸다.

천하제일의 자리에 오른 구시켄은 4년 5개월간 철권통치로 항거하는 숱한 자객들을 도륙한다.

왕좌에 오른 3개월 후 동급 2위 파나마의 하이메 리오스와 1차 지명방어전을 일본 동경 무도관에서 치러 2:1 15회 판정으로 물리치고 방어전을 마친다. 구시켄으로서는 2회 다운까지 허용한 졸전이었다.

1977년 5월 22일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구시켄은 베네수엘라의 리고베르토 마르카노와의 2차 방어전에서도 고전 끝에 2:1 판정으로 신승한다.

두 차례의 방어전이 구시켄에게는 약이 되었다. 이후 그는 저 넓은 창공을 나는 칸무리와시처럼 거칠 것 없이 날아다닌다.

몬챠얌 하우 마하차이, 아니셀토 바르가스, 하이메 리오스, 정상일, 리고베르토 마르카노, 알폰소 로페즈 이상은 1977년 10월 9일 부터 1979년 4월 8일까지 구시켄의 묵검(墨劍) 아래 이슬처럼 살아져간 자객 명단이다. 그 누구도 마지막 공 소리를 듣지 못했다. 6연속 KO방어는 지금도 일본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당시 일본인 최초로 8차 방어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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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연속 KO로드 중간에 논타이틀전으로 대한민국 낳은 ‘난타전의 제왕’ 김막동도 구시켄의 제물이 되었다.

1979년 7월 29일,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구축한 구시켄은 파나마의 강타자 라파엘 페드로사를 후쿠오카로 불러 들여 압도적인 점수 차로 심판전원일치 판정으로 돌려세우고 9차 방어의 벽을 넘어선다.

그해 10월 28일, 필리핀의 헝그리 복서 티토 아벨라의 암습을 받지만 구시켄은 탄지신공으로 7회에 날려버리고 대망의 10차 방어 고지를 점령한다.

해가 바뀐 다음 해 정월 27일, 대한민국의 김용현이 야심차게 도전장을 내밀지만 3:0 판정패로 11차 방어의 제물이 된다. 김용현이 나름대로 선전한 경기였다.

이어 구시켄은 68전에 빛나는 칠레의 강타자 마르틴 바르가스마저 8회에 주저앉히고 12차 방어전을 마무리한다.

영원할 것 같았던 구시켄의 왕국에 어둠이 짙어 오고 있었다. 그 어둠의 실체는 멕시코의 자객 페드로 플로레스였다.

1980년 10월 12일, 이시카와현(石川県) 카나자와시(金沢市)에서 치러진 13차 방어전에서 졸전 끝에 홈 텃세로 억지 승리를 거둔다. 이에 플로레스 측의 강력한 항의에 구시켄은 재대결을 수락한다.

구시켄의 결혼을 앞 둔 1981년 3월 8일, 자신의 고향 오키나와 쿠지가와시(현재 우루마시)에서 플로레스와의 재대결이 치러진다. 구시켄의 14차 방어전이었다. 당시 구시켄의 23연승(15KO)에 비해 플로레스는 16승(4KO) 7패의 그저 그런 평범한 전사였다.

초반부터 플로레스의 압박은 매서웠다. 도전자는 구시켄이 내미는 펀치를 아랑곳 하지 않고 돌진한다. 라운드를 거듭 할수록 구시켄의 눈에는 공포가 어려 있었다. 8회, 구시켄이 첫 번째 다운을 허용한다. 이어 12회 도전자의 강력한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허용, 두 번째 다운을 당한다. 괴로운 표정으로 일어선 구시켄을 도전자는 상처 난 먹잇감을 본 듯 무차별 공습을 가한다. 보다 못한 세컨측에서 타올을 던진다. 그렇게 강력했던 구시켄의 왕조가 막이 내리고 있었다.

구시켄 왕조를 함락시킨 플로레스는 1차 방어전에서 대한민국의 김환진에게 KO로 무너지며 그의 시대는 삼일천하로 막을 내린다.

플로레스에게 패한 구시켄은 재기를 꿈꾸지만 그의 주치의는 더 이상 강호에 남아 있으면 시력을 상실 할 수 있다는 충고를 받아 들여 화려했던 강호를 뒤로 한 채 역사적으로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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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구시켄은 복싱도장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지금까지 방송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이기기 위해 시합 전 상대방에게 약물을 투여, 전의를 상실하게 한 후 경기를 치렀다는 가네히라 스캔들이 터지면서 구시켄은 오랫동안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하다 올해에 와서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구시켄 요코, 그는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긴 세월을 강호를 종횡무진하며 큰 획을 끈 전사였다. 13차 방어는 아직도 일본 남자 복싱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쓰러진 상대를 가격하는 등 지저분한 경기 매너가 종종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가 남긴 족적을 가리지는 못 할 것이다.

생애 통산 전적  24전 23승(15KO) 1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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