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의 대학교수 미구엘 칸토

링의 대학교수 미구엘 칸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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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구엘 칸토는 멕시칸 복서 중 특이한 존재였다

모름지기 맹주의 자리를 건 비무(比武)대회는 강렬하고 화끈해야 세인들이 열광하고 그리고 결과에 따라 대회의 우승자를 영웅으로 칭송하고 추앙한다.

그런데 일발필살의 강렬함이 없어도 화려한 콤비네이션으로 무장, 적지 일본에서 맹주 결정전을 벌려 오쿠마 쇼지를 꺾고 대한민국의 희망 박찬희에게 완패하기 전까지 무려 4년 2개월간 플라이급 왕좌를 지켜 온 이가 있다. 그가 바로 ‘미구엘 칸토’다. 그를 가리켜 세인들은 ‘멕시코의 작은 별’ 혹은 ‘링의 대학교수’라 불렸다.

세계타이틀매치 통산전적 18전 15승(1KO) 1무 2패, 전적에서 보듯 그에게는 통상 세인들이 알고 있는 멕시칸 특유의 일발필살의 강렬함은 없다. 그리고 그의 나약함(?)은 154센티의 단신에 우수에 젖은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서러워 울 것 같은 인상에서도 잘 나타난다.

미구엘 칸토는 멕시칸 복서 중 특이한 존재였다. 구티 에스파다스, 루벤 올리바레즈, 알폰소 자모라, 카를로스 자라테, 호세 피피노 쿠에바스 등 가공할 파괴력을 앞세워 매 경기마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이 나는 파이팅 머신들이 대세를 장악한 시대에 이에 반해 칸토는 아기자기한 기술로 무장하고 험한 강호의 길을 개척해 온 입지적인 맹주였다.

프로로 데뷔, 자신만의 신무기를 장착하다

미구엘 칸토는 1948년 1월 30일 멕시코의 반도 마야문명의 발상지인 유카탄의 주도(州都) 메리다에서 태어났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브라질의 사내아이는 축구공을 가지고 태어나고 멕시칸의 사내아이는 복싱글러브를 끼고 태어난다 했다. 그만큼 그 시대를 살아가는 멕시칸들에게는 복서로서의 성공은 곧바로 부와 명예로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칸토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1969년 2월 5일 대망의 꿈을 안고 21살이 되던 해 프로로 데뷔한다. 그러나 데뷔전부터 묵사발이 된다. 라울 에르난데스에게 3회 TKO로 패하고 만다.

3개월 후 페드로 마르티네스에게 4회 판정으로 신승한 후 다음 경기에서 또 다시 페드로 칼리로에게 소나기 펀치를 맞고 링 바닥을 기다가 4회 TKO로 지고 만다.

본인 스스로 자신의 못난 재능을 탓하고 좌절하였더라면 위대한 복서 미구엘 칸토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하사하지 않은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다. 칸토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발하고 피나는 연습을 통해 오늘 날 세인들에게 전설로 회자된다.

일반적으로 연타에는 교과서적인 패턴이 있다. 원투 다음에 레프트 훅, 라이트 스트레이트 그리고 어퍼 컷을 날리는 것이다.

칸토는 이 연결동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훗날 그는 그러한 연타 패턴을 복싱역사상 가장 자연스럽고 완벽하게 소화한 선수로 칭송 받는다.

칸토는 새로운 무기를 장착하고 진군하기 시작한다. 1969년 12월부터 1970년 7월까지 두 번의 무승부를 포함해서 7연승 가도를 달린다. 그중 두 번의 KO승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다 그해 10월 타르시시오 고메즈에게 10회 판정패로 일격을 당한다. 칸토는 절망하지 않는다. 더 나은 시합을 위해 자신의 전매특허인 연타를 갈고 닦는다.

1970년 11월부터 1971년 12월까지 칸토는 거칠 것이 없었다. 파죽의 14연승을 달린다. 그중 다섯 번의 KO승을 수확한다.

1971년 정월, 칸토는 록키 가르시아를 12회 판정으로 제압하고 멕시코 플라이급 타이틀을 손에 쥐면서 차츰 강호에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멕시코 타이틀을 획득한 후 칸토는 12전(戰)을 소화한다. 그중 3번의 타이틀 방어를 포함하여 11승(5KO) 1무승부라는 준수한 성적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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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세계도전과 좌절 그리고 마침내 천하를 재패하다

프로로 전향한지 4년 4개월 만에 칸토에게 첫 천하재패의 기회가 찾아온다. 상대는 베네수엘라의 강타자 베툴리오 곤잘레스. 플라이급의 권력자 태국의 ‘빛나는 별’ 베니세 보코솔이 체급을 옮기면서 공석이 되어버린 WBC 플라이급 왕좌를 놓고 양웅(兩雄)은 맞붙는다.

1973년 8월 4일 베네수엘라 마라카이보. 당시 곤잘레스는 41전 35승(19KO) 2무 4패, 칸토는 39전 33승(12KO) 3무 3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칸토에게는 첫 세계타이틀전이지만 곤잘레스는 천하재패의 꿈을 문턱에서 세 번이나 좌절되고 이번이 네 번째 도전하고 있었다.

열성적인 자국 팬들의 성원을 등에 업은 곤잘레스는 1회부터 난타전을 전개하지만 칸토의 예술적인 연타에 고전한다. 15회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울리고 결과는 곤잘레스의 2대0 판정승으로 플라이급 맹주에 오른다.

실망도 잠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칸토는 자국으로 돌아온다. 세계도전에 실패한 그해 11월 멕시코 플라이급 타이틀전에서 루페 에르난데스를 12회 판정으로 제압하고 잠시 휴식기를 갖는다.

1974년 칸토는 5연승(1KO)을 달린다. 그중 1번은 멕시코 플라이급타이틀 방어전이었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던 칸토에게 또 다시 천하재패의 기회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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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툴리오 곤잘레스에게서 떠난 왕관은 태평양을 가로 질러 멀리 일본의 오쿠마 쇼지에게 가 있었다.

오쿠마 쇼지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선수다. 훗날 대한민국의 희망 박찬희에게서 타이틀을 빼앗아간 장본인이다. 박찬희 프로 생애 4번의 패배 중 3번을 오쿠마 쇼지에게 당한다. 그야말로 박찬희의 천적이었다.

1975년 1월 8일 일본 센다이에서 열린 WBC 플라이급 세계타이틀매치는 미구엘 칸토의 전매특허 연타기술이 입신(入神)의 경지에 도달한 것을 증명한 무대였다.

사우스포(왼손잡이)인 챔피언 오쿠마를 15라운드 내내 연타로 농락한 경기였다. 결과는 홈 텃세에도 불구, 주심 145:147 칸토 우세, 부심 145:149 칸토 우세, 또 하나의 부심 147:147로 무승부 칸토는 2:0 판정승으로 꿈에 그리던 맹주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맹주에 오른 칸토는 전 세계를 떠돌며 4년 2개월간 플라이급 절대군주로 군림한다.

전 세계를 오가며 영원한 제국을 건설하다

1975년 3월 이그나시오 에스피날을 논타이틀전에서 10회 판정으로 제압하고 그해 5월 첫 세계도전에서 아픔을 준 상대 베툴리오 곤잘레스를 홈 링으로 불러 15회 판정으로 앙갚음하며 1차 방어에 성공한다.

루페 마데라를 논타이틀전에서 9회 TKO로 날려버리고 일본의 신성 다카다 진로를 11회 TKO로 2차 방어에 성공한다. 이 시합은 칸토 방어전중 유일하게 KO승으로 장식한 경기였다.

1975년 한해가 저물어 가는 12월, 칸토는 2년 전에 대전한 바 있는 이그나시오 에스피날을 15회 판정으로 물리치고 3차 방어까지 마무리 한다.

거칠 것이 없는 칸토는 1976년 세 번의 방어전을 치른다. 하나카다 스스무, 베툴리오 곤잘레스, 올랜도 하비에르를 차례로 꺾고 6차 방어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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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위대한 챔피언 칸토는 4차례의 방어전을 치른다. 적지 베네수엘라 카라카스로 날아 가 루이스 레이야스 아르날을 제압하고 다시 일본으로 진군한다. 후레사와 기미오를 가지고 놀며 가볍게 8차 방어마저 돌파한다.

다시 멕시코로 날아 온 칸토는 마틴 발가스를 제압하고 9차 방어에 성공하지만 발가스는 편파판정이었다며 이의를 제기하여 재대결 결정을 받아낸다.

칸토는 다시 멕시코를 떠나 칠레 산티아고로 날아가 도전자 발가스가 군소리 못하게 입에 재갈을 물리고 10차 방어 고지까지 점령한다.

1978년 정월 초나흘, 칸토는 전 챔피언 오쿠마 쇼지의 도전을 받아 일본으로 상륙한다. 도전자의 선전에 고전하지만 무난하게 방어를 완료한다.

그해 4월, 오쿠마 쇼지는 또 다시 챔피언 칸토를 일본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 시합과 동일하게 2:1 판정승으로 12차 방어의 벽을 넘는다.

살아 있는 전설이 된 ‘링의 대학교수’ 칸토는 타콤론 비본차이를 제압하고 13차 방어를 성공하고 1979년 2월 안토니오 아벨라를 자신의 고향으로 불러들여 14차 방어까지 완료한다.

칸토의 몰락 그리고 영원한 전설로 남다

영원한 제국 칸토에게 14차 방어의 여운이 채 가시기전에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이제 채 10전 밖에 치르지 않은 새파란 애송이(?)가 겁 없이 도전장을 내민다.

칸토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흔쾌히 도전을 허락한다.

1979년 3월 18일 부산 구덕체육관. 입추에 여지없이 모인 수많은 관중은 ‘박찬희’를 연호한다.

당시 챔피언 칸토는 57승(15KO) 3무 4패, 도전자 박찬희 9승(5KO) 1무승부의 전적을 가지고 있었다. 전적으로만 보아도 6배 이상의 경력차이가 있었다. 그때 챔피언 31세, 도전자가 22살의 대학생 복서였다.

절대열세라는 세인들의 예상을 깨고 도전자 박찬희는 매 라운드마다 종료 30초를 남기고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착실히 포인트를 획득, 결국 거대한 제국 칸토를 침몰시킨다. 심판전원 일치 15회 판정승이었다.

14차 방어가 끝나고 36일 만에 원정 방어전을 쉽게 수락한 챔피언 칸토는 도전자를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칸토는 이 경기가 6년만의 패배였다.

무관으로 전락한 칸토는 새로운 마음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와신상담’하여 왕좌를 빼앗긴 그해 9월 박찬희에게 도전하지만 15회 무승부로 맹주의 자리를 탈취하는데 실패한다.

그렇게 영원한 제국 칸토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이후 8번의 경기를 가지지만 4승 4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남기고 1982년 7월 파란만장했던 사각의 링을 뒤로하고 은퇴를 선언한다.

칸토는 일발필살의 파괴력은 없어도 예술 같은 콤비네이션을 장착하고 한 시대를 풍미한 절대고수였다. 지금도 수많은 복싱문하생들이 그의 기술을 접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세월이 흐른 뒤 ‘링’ 지(紙)는 그를 멕시칸 복서 중 ‘위대한 선수’ 4위에 올려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도 세인들은 사슴을 닮은 슬픈 눈망울을 한 가녀린 용모와 흡사 교과서와도 같은 그의 연타기술을 그리워한다.

생애 통산전적  74전 61승(15KO) 4무 9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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