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의 영웅 ‘돌주먹’ 로베르토 두란
뒷골목에서 양지(陽地)로, 전설의 탄생
1970년대 후반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 조 프레이저, 헤비급을 황금시대로 이끌었던 위대한 전사 3인방이 사라져 버린 헤비급은 이제 더 이상 매력적인 체급이 아니었다.
그들이 떠나 버린 빈자리는 너무나 공허했다. 그래서 세인들은 자신들의 갈망을 채워 줄 위대한 전사의 탄생을 간절히 바랬다.
무하마드 알리의 흉내쟁이 래리 홈즈에게 슬슬 짜증이 날 무렵 전설의 절정고수 4인방이 등장한다. 세인들은 그들을 사대천황이라 불렸다. 그것도 헤비급이 아닌 웰터급 그리고 미들급이었다. 그중 한명이 파나마의 영웅 ‘돌주먹(Manos de Piedra)’ 로베르토 두란 이었다. 풀네임은 로베르토 두란 사마니에고 이다.
두란은 1951년 6월 16일 중미 파나마 공화국 엘초리요에서 파나마인(人) 어머니와 멕시코계(係)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 엘초리요는 파나마운하 건설로 형성된 도시로서 수많은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의 뉴욕과 같은 타운이었다. 또한 힘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비정의 도시였다. 두란은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 온 한 마리의 맹수였다.
텁수룩한 사자 수염에 강인한 인상 그리고 상대를 꿰뚫을 듯한 시퍼런 안광(眼光) 게다가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펀치 스피드와 일발필살(一發必殺)의 파괴력까지 겸비한 야수(野獸)였다.
어린 시절 뒷골목 싸움판에서 두란은 잔뼈가 굵었다. 그래서 그는 170센티의 단신임에도 불구하고 사각의 캔버스에서 거리의 싸움꾼처럼 야성미를 과시한다. 훗날 스스로가 “나는 링 밖에선 짐승이 아니다. 그러나 링 위에선 나는 야수 그 이상이 된다.”고 술회한다.
두란은 거리의 싸움꾼에서 1968년 그가 16세가 되던 해 강호에 발을 담근다. 데뷔전에서 카를로스 멘도샤를 4회 판정으로 이기고 프로선수로 시작한다.
1968년 5월부터 1969년 1월까지 9연속 KO승을 쓸어 담는다. 그중 7명은 1라운드 종료 공을 듣지 못한다.
21세의 나이로 맹주에 오르다
거칠 것이 없는 초원의 맹수 두란은 WBA 라이트급 세계챔피언 스코틀랜드의 캔 부캐넌에게 도전하기 전까지 28연승(24KO)을 달린다.
부캐넌은 기교파 복서로서 이스마엘 라구나에게서 15회 판정으로 왕좌를 탈취한 후 3차 방어 상대로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할 상대 두란과 외나무다리에서 진검승부를 펼치게 되었다.
1972년 6월 26일 미국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 챔피언 부캐넌은 44전 43승(15KO) 1패의 전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시합과 동시 두란은 챔피언의 빠른 발과 테크닉에 고전하지만 13회 기어코 부캐넌을 우리안(?)에 가두고 몰매를 선사한다. 새로운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챔피언 측에서 로우 블로우(급소 가격)였다고 격렬하게 항의해 보지만 13회 TKO라는 판정은 번복되지 않는다.
그때 두란의 나이 불과 21세였다.
왕좌에 오른 그해 두란은 세 번의 논타이틀전을 치른다. 두 번은 1회에 요절을 내지만 세 번째 시합에서 에스테반 데 헤수스에게 생애 최초 첫 패배를 경험한다. 과도한 자만과 연습부족으로 인한 패배였다.
9연속 KO방어 그리고 라이트급 천하를 한손에 쥐다
1973년 1월 20일. 지미 로버트슨을 홈으로 불러 라이트 한방으로 5회에 링 바닥에 패대기치고 가볍게 1차 방어에 성공한다.
방어전 이후 두란은 한 달에 한 번씩 논타이틀전으로 링 위에 올라 3승(2KO)을 수확한 후 1973년 6월 2일 헥토르 톰슨을 8회에 날려 버리고 2차 방어에 성공한다.
이제 거칠 것이 없는 ‘돌주먹’ 두란은 라이트급을 자신의 왕국으로 건설해 간다. 이시마츠를 파나마로 불러 10회 레프리 스톱으로 3차 방어에 성공하고, 다음 4차 방어 상대는 자신에게 생애 최초로 치욕을 안긴 푸에르토리코의 에스테반 데 헤수스였다.
당시 두란은 42전 41승(35KO) 1패, 도전자 헤수스는 43전 42승(23KO) 1패의 전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치고 빠지는 전법을 구사하는 도전자에게 두란은 고전하지만 두 번 실수는 되풀이 하지는 않는다. 11회 다리가 풀린 도전자를 코너에 가두고 챔피언은 양손에 들린 쇠망치를 휘두른다. 30초 후 도전자는 입에 거품을 물고 큰대자로 하얀 캔버스에 자신의 안방처럼 드러눕는다.
이제 갓 23세가 된 젊은 맹수 두란은 거침없이 자신의 왕국을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철옹성을 구축해 간다.
1974년 12월 21일, 일본의 유망주 다카야마 마사타카를 시작과 함께 52초 만에 링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가볍게 5차 방어에 성공하고 1975년 3월 2일 레이 렘프킨을 14회 종료 직전 KO로 6차 방어의 벽을 넘는다.
1975년이 저물어 가는 12월 사나운 맹수 두란은 레온시오 오티즈를 15회까지 가는 접전속에 종료 1분을 남기고 도전자를 기어이 링 바닥에 눕히고 7차 방어에 성공한다.
위대한 통치자 두란은 미국시장에서 자신의 상품가치를 7차 방어에서 증명한 후 8차 방어전에서 로우 비자로를 14회, 알바로 로하스를 미국 할리우드에서 1회에 차례로 날려 버린다. 1976년도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1977년 정월, 두란은 미국 마이애미 비치에서 윌로마 페르난데스를 13회 KO로 제압하고 9연속 KO방어 행진을 계속한다. 라이트급은 위대한 맹주 두란의 철권통치에 신음한다.
1977년 9월 17일, 두란의 연속 KO 방어 행진이 물귀신 에드윈 비루에트에 의해 깨진다. 도전자는 15회 내내 필사적으로 탈출(?)을 감행하여 결국 판정까지 몰고 가서 패한다.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쉽게 비무(比武)를 요청하지 못하자 두란은 WBC 라이트급 왕좌마저 넘본다. 당시 WBC 라이트급은 두란 자신과 1승씩을 주고받은 에스테반 데 헤수스였다.
1978년 새해, 두란의 집요한 꼬드김(?)에 넘어간 헤수스는 통합타이틀전을 수락한다.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진행된 통합타이틀전은 헤수스가 전번 4차 방어전 보다 1회를 더 버티다 12회에 장렬하게 산화한다.
라이트급을 버리고 다(多)체급 석권 대야망의 시작 그리고 전설의 사대천황이 되다
라이트급 천하를 통일한 후 두란은 또 다시 정복의 야욕을 드러낸다. 이제 자신의 체급에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다고 확신하고 미련 없이 라이트급의 왕관을 내팽개치고 2체급을 올려 웰터급의 무대로 진출한다.
체급을 올린 후 두란은 무풍지대를 달린다. 그에게는 2체급을 올린 후유증 따윈 없었다. 파죽(破竹)의 8연승을 일궈낸다.
1980년 6월 20일, 마침내 두란에게 도전기회가 온다. 상대는 최고의 절정기를 맞고 있는 절정고수 4인방 중 한명인 ‘신이 내린 인간 최고의 복서’ WBC 웰터급 세계챔피언 슈거레이 레너드였다.
캐나다 몬트리올. 당시 두란은 72전 71승(55KO) 1패, 챔피언 레너드가 27전승(15KO)이었다. 이 경기는 전 세계에 생중계 할 정도로 비장한 관심을 모았다.
세계 최고의 테크니션인 레너드와 맞장 뜬 두란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기술, 파워, 노련미에서 밀리지 않았다.
레너드가 복싱을 시작한 후 그날이 가장 많이 얻어터진 날로 기억될 만큼 두란의 압도적인 판정승이었다.
그 승리로 두란은 복싱계 최고의 맹주로 추앙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조국 파나마는 그 승리를 기념하여 그의 귀국일(歸國日)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한다.
슈가레이 레너드와의 리턴매치에서 패배, 다시 체급을 올리다
두란과 레너드의 시합으로 떼돈을 거머쥔 프로복싱계의 거물 돈 킹과 봅 애럽은 양자의 재대결을 추진한다.
금력의 힘은 막강했다. 1차 비무가 끝난 지 채 5개월이 되지 않아 양자는 다시 그해 11월 25일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만났다.
7회까지 양자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시합이었다. 8회가 시작되고 2분 후 돌연히 챔피언 두란이 시합을 포기한다.
지금도 왜 두란이 시합을 포기했는지는 많은 말들이 있지만 급성 위경련이라는 설이 가장 정확한 것 같다.
그렇게 위대한 두란의 시대가 저물어 가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선다. 2체급 석권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체급을 더 올려 라이트 미들급으로 전향한다.
2연승 후 두란에게 기회가 온다. 상대는 WBC 라이트 미들급 세계챔피언 푸에르토리코의 ‘게으른 천재’ 윌프레도 베니테스였다.
1982년 1월 30일. 미국 라스베가스, 당시 챔피언 베니테스는 45전 43승(27KO) 1무 1패의 전적이었다. 레너드에게 패한 것이 유일한 1패였다.
시종일관 난타전으로 전개되었지만 두란의 쇠망치가 정통으로 들어간 것이 없었다. 결과는 부심 3명 모두 142:143, 141:145, 141:144으로 근소하지만 챔피언의 만장일치 판정승이었다.
3체급 석권 그리고 헤글러에게 4체급 도전이 좌절되다
두란은 절망하지 않는다. 재기 전에서 1승 1패를 기록하고 멕시코의 괴물 호세 피피노 쿠에바스를 도전자 결정전에서 4회 KO로 박살내고 도전권을 손에 넣는다.
챔피언 벨트는 베니테스 품을 떠나 신성 미국의 데비 무어에게 가 있었다. 무어는 당시 12전승(9KO)을 기록하고 있는 햇병아리 챔피언이었다.
1983년 6월 16일 뉴욕에서 거행된 라이트 미들급 타이틀매치는 32세의 백전노장 두란의 건재함을 전 세계 복싱팬들에게 알리는 날이었다. 무어는 8회까지가 한계였다.
3체급을 석권하고 살아 있는 전설이 된 두란의 야망은 끝이 없었다. 그는 한 체급 위의 미들급을 째려보기 시작했다. 당시 미들급의 맹주가 누구던가? 위대한 마브러스 마빈 헤글러가 아니던가.
미들급 통치자 헤글러는 절정고수 4인방의 중 일인이며 당시 3개의 타이틀을 혼자 거머쥐고 누구도 자신의 영역에 범접하지 못하도록 철옹성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두란은 상대가 누군지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로지 적이 있으면 쓰러 뜨려야 된다는 일념뿐이었다.
1983년 11월 10일, 3개 통합타이틀 매치는 미국 라스베가스를 15회 내내 피로 물들였다. 그 만큼 선혈이 낭자한 혈투였다. 결과는 부심 3명이 142:144, 145:146, 143:144로 헤글러의 전원일치 판정승이었지만 1점차 박빙의 승부였다.
무관으로 전락 2년간 칩거 후 4체급을 손에 넣다
그 다음해 6월 15일 두란은 또 한명의 절정고수 4인방 중 일인인 저격수 토마즈 헌즈에게 2회 너무나 허무하게 라이트 미들급 왕관을 내주고 무관으로 전락한다.
헌즈에게 패한 후 두란은 2년 동안 칩거하다 1986년 새해 홀연히 링으로 복귀해 매누얼 잠브라노를 2회에 실신시키고 천하에 두란이 죽지 않았음을 알린다.
이후 1988년 까지 두란은 6승 1패의 전적을 올린다. 그때 그의 나이 37살이었다.
헤글러가 떠난 미들급은 군웅할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수차례 맹주가 바뀌다 WBC 미들급 왕관은 토마스 헌즈에게 역전으로 KO승한 이안 바클리에게 가 있었다.
1989년 2월 24일 두란은 바클리를 12회 판정으로 꺾고 마침내 4체급 달성에 성공하지만 그해 12월 슈거레이 레너드에게 1차 방어에서 12회 판정으로 왕관을 내주고 만다.
새로운 도전과 몰락, 전설이 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지다
그 후 두란은 3번의 IBF 왕좌에 도전하지만 실패하고 51세가 되던 해 노익장을 과시 내친김에 WBA 미들급 왕좌까지 도전하지만 이 역시 실패한다.
꺼질 줄 모르던 두란의 열정은 2001년 헥토르 카마쵸와의 시합을 끝으로 35년간 정들었던 사각의 캔버스를 뒤로 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다.
1980년대 슈거레이 레너드, 마빈 헤글러, 토마스 헌즈와 더불어 전 세계 복싱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전설의 사대천황 중 일인인 로베르토 두란, 그들 중 두란은 가장 야성적이고 터프한 시합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훗날 링 지는 두란을 1980년대 복싱역사상 위대한 선수 5위 그리고 20세기 라이트급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선정하였다.
파나마에서 배출한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조국 파나마에선 국민적 영웅으로 지금도 추앙 받고 있으며 상대를 압도하는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지금도 수많은 팬들이 그를 그리워한다.
두란의 대(代)를 이어 그의 딸과 아들도 현역 복서로 활동 중에 있다.
로베르토 두란 생애 통산 전적 119전 103승(70KO) 16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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