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

20세기 최고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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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창조한 모든 스포츠에서 ‘무하마드 알리’만큼 대중적이며 위대한 선수가 또 존재할까.

개명 전 무하마드 알리의 본명은 캐시어스 마셀루스 클레이 주니어다. 팬들은 그를 캐시어스 클레이라 불렸다. 18세에 아마추어 선수로서 180승을 올린 그는 1960년 로마올림픽 라이트 헤비급 미국선수로 출정하여 금메달을 목에 건다. 

당시 소련의 한 기자가 미국의 인종문제를 거론하자 클레이는 “당신네 독자들에게 전하시오. 우리들은 그 문제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있기 때문에 조금도 걱정하지 않소. 미국은 나에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나라입니다.”그가 인터뷰 한 내용이 전 미국에 공개되자 국민들은 그를 영웅으로 칭송하고 환영한다. 

그러나 자신의 눈앞에 있는 현실은 달랐다.

그는 스스로 국가적인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와 같이 고향의 한 식당에서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난 깜둥이한테 음식을 팔지 않아.” 식당 주인의 한마디에 그는 망설임 없이 강으로 달려간다.내가 무엇을 이뤄냈던 깜둥이라는 굴레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클레이는 푸른 강물에 미련 없이 금메달을 던져 버렸다. 젊은시절 알리와 그의 트레이너 안젤로 던디.이것은 앞으로 그에게 닥쳐 올 작은 시련에 불과했다.

캐시어스 클레이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1월 17일 미국 캔터기주 루이빌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던 곳은 특히 인종차별이 심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자신의 존재이유를 생각하고 그것이 바로 자존심으로 발전한다.

클레이가 12살 되던 해 우연히 라디오에서 록키 마르시아노의 생중계 시합을 듣는다. 훗날 그는 당시 라디오에서 “우리의 세계 헤비급 챔피언 록키 마르시아노입니다.”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뼈를 간통하는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모든 것을 복싱에만 전념한다. 그에겐 타고난 천재성과 자존심이 있었지만 무엇 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를 꼭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에게 앞으로 펼쳐지는 시련과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신념 그리고 좌절을 딛고 일어선 끈기와 집념 때문이다.

로마 올림픽에서 획득한 금메달을 강물 속에 던진 그해, 클레이는 루이스 스폰서 그룹과 프로계약을 체결한 뒤 10월 29일 프로로 데뷔한다. 그때 그의 나이 18살이었다.

프로로 전향한 그에게 거칠 것이 없었다. 더불어 프로선수의 성공요소 중 하나인 쇼맨쉽이라는 새로운 무기도 장착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떠벌이’라는 새로운 닉네임도 생긴다.1962년 11월 15일 클레이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인간 기관차 소니 리스튼에게 도전 할 수 있는 전초전이었다. 

상대는 전 세계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아치 무어. 그는 대기실에서 호언한다. “무어는 절대 4회를 넘기지 못한다.” 클레이의 호언대로 4회 KO로 제압한다. ‘떠벌이 클레이’ 전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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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2월 25일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비치 컨벤션 홀.WBA, WBC 세계 헤비급 통합챔피언 소니 리스튼. 

이에 맞서는 도전자 캐시어스 클레이. 당시 리스튼은 38전 37승(28KO) 1패, 클레이가 19전승(15KO)의 전적이었다.

챔피언 소니 리스튼은 레프트 잽으로도 상대를 KO시킬 수 있는 철권이었다. 강타자 플로이드 패트슨에 도전, 챔피언 벨트를 탈취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25초면 충분했다. 그때부터 그를 불곰 혹은 인간기관차 라고 불렸다.

닭 모가지 비틀듯 가볍게 1차 방어에 성공한 리스튼은 2차 방어 상대인 풋내기(?) 클레이를 연습상대 정도로만 생각했다. 

도박사들도 9:1로 리스튼의 압도적인 우세를 예상했었다. 하지만 클레이는 경기 전 인터뷰에서 “소니 리스튼은 허접한 녀석이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 며 상대를 자극했다. 

리스튼은 과묵했지만 클레이는 끊임없이 독설을 날렸다.

드디어 시합을 알리는 공이 울린다. 리스튼은 특유의 강펀치를 휘두르며 마치 저승사자 처럼 뚜벅뚜벅 다가온다. 챔피언의 주먹이 클레이의 몸통을 강타할 때 마다 관중석에선 비명에 가까운 탄성이 터진다.

하지만 클레이는 마치 경량급 선수처럼 빠른 발을 이용 링 위를 춤추듯 돌아다니며 리스튼의 살인 주먹을 무력하게 만든다.

클레이는 날카로운 잽과 스트레이트를 이용 6회 공이 울리기 전, 챔피언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는다. 이미 리스튼의 두 눈 위쪽이 터져 더 이상의 경기 속개는 불가능했다. 7회 시작공이 울렸지만 링 위에 나선 것은 리스튼이 아니라 흰색 수건이었다. 클레이의 7회 TKO승. 

거짓말 같은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 시합 후 클레이는 미국인들이 노예에게 부여한 성(姓)인 클레이를 버린다. 그는 또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다. 이슬람국가운동의 최고 지도자인 엘리야 무하마드는 그에게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이때부터 지구상에 케시어스 클레이는 사라지고 오직 위대한 선수 '무하마드 알리' 만이 전설이 된다.

1964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 리스튼과의 리턴매치. 

하지만 결과는 너무나 허무했다. 단 2분 만에 리스튼은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야 했다. 알리의 1회 KO승. 알리에게 연패한 이후 리스튼은 인간기관차에서 늙은 곰으로 불리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그럼에도 리스튼은 재기에 성공, 승승장구 하지만 더 이상의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한다.(리스튼은 38세 되던 해 자택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다)

1966년 12월 까지 알리는 헤비급 통합타이틀을 9차까지 방어에 성공한다. 그에게는 적수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적수는 링 안이 아닌 링 밖에 있었다. 1967년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다. 미국 정부는 그에게 징집영장을 보낸다. 하지만 그는 전쟁에 참여 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베트콩은 나를 깜둥이라 무시하지 않습니다. 내가 왜 그들을 죽여야 한단 말입니까.” 알리의 말이 언론에 보도되자 미국 전역에서 협박 편지 그리고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그해 4월 28일 징병위원회 출두도 거부한다. 그 댓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선수자격 정지는 물론 챔피언 타이틀도 박탈당한다. 이어서 검찰에 기소되어 법정에서 5년의 실형을 언도 받는다.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실질적인 수입이 없어지자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하나 둘씩 떠나가고 자신에게 이름을 하사한 엘리야 무하마드는 종파의 칙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종단에서 제명한다.

그러나 세상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미국민은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이 지루한 전쟁에 희생되는 청년들의 죽음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은 거센 반전운동으로 번진다. 징집거부 후 3년간의 지루한 법정 다툼은 반전 운동에 힘입어 마침내 대법원의 무죄 판결로 종지부를 찍는다.

알리는 자신의 신념은 지켜내지만 복서로의 환갑인 서른 살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벗어던진 글로버를 다시 끼고 예전의 기량을 되찾기 위해 맹훈련에 돌입한다.

1970년 10월 알리는 3년 만에 링으로 복귀한다.재기 전 상대는 세계 헤비급 통합 1위 제리 쿼리. 알리는 자신의 건재를 어필 하는데 9분이면 충분했다. 알리의 3회 TKO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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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3월 8일. 정부(政府)에게 빼앗긴 벨트를 되찾기 위해 세계 헤비급 통합 챔피언 조 프레이저에 도전하지만 15회 판정으로 패하고 만다. 무하마드 알리의 프로 첫 패배였다. 

이 경기는 아웃복서와 인파이터의 교과서로 불린다. 끊임없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상대의 가슴속으로 파고들며 좌우 훅을 날리는 프레이저, 반면 빠른 발을 이용 좌우로 빠지며 잽에 이은 스트레이트로 상대하는 알리. 경기 결과는 알리의 패배로 끝나지만 이때부터 헤비급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프로 통산 생애 첫 패배를 당했지만 알리는 좌절하지 않는다. 1972년 마크 포스트를 판정으로 제압하고 그 다음해 타이틀 도전 전초전으로 캔 노턴과의 시합에서 생애 두 번째 패배를 맞본다.

전초전에 패한 알리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도 잠시 혹독한 훈련과 훈련을 거듭하여 1973년 9월 캔 노턴과의 재 시합에서 판정으로 설욕한다.

1974년 1월. 알리는 타이틀에 도전 할 수 있는 또 한 번 기회를 잡는다. 상대는 그에게 첫 패배를 안긴 스모킨 조(마치 펀치가 연기처럼 상대방의 몸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뜻에서 부쳐진 닉네임), 조 프레이저였다.

알리는 프레이저의 저돌적인 공세에 고전하지만 한 선수에게 두 번의 패배는 허용하지 않는다. 알리의 12회 판정승. 

타이틀 도전권을 손에 거머쥔 알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은 자이레(현,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사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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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는 세계 헤비급 통합 챔피언 공포와 전율의 대명사 핵탄두 조지 포먼.

포먼은 당시 27전승의 챔피언 조 프레이저를 단 255초 만에 6번을 링 바닥에 팽개치고 챔피언 벨트를 손에 넣는다. 그후 포먼은 2차례의 방어전을 치른다. 그에게 2번의 방어전에 걸린 시간은 불과 4분이었다.

1974년 10월 30일. WBA, WBC 통합 헤비급 타이틀매치. 25세의 챔피언 조지 포먼, 32세의 도전자 무하마드 알리. 

당시 포먼은 40전승(37KO)을 기록중이였다.

시합 전 알리는 “나는 링 안이 아닌 링 밖에서 빼앗긴 벨트를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조지가 아닌 세상을 향해 펀치를 날릴 것이다.” 며 전의를 다졌다. 도박사들은 노쇠한 알리가 과연 몇 회까지 버틸 수 있는지가 관심사였다.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자 포먼은 무시무시한 살인 펀치를 휘두르며 알리를 압박해 간다. 알리는 이미 예측한 듯 특유의 빠른 발로 포먼을 현혹시킨다.

2회전 시작과 동시 포먼은 알리의 주먹은 아랑곳 하지 않고 쇠망치를 휘두르듯 알리의 몸통과 커버링을 한 안면을 마구잡이로 두들긴다. 관중석에선 포먼의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 마다 전율의 비명을 지른다.

3회부터 6회 까지 알리는 계속해서 로프를 등지고 방어에만 치중한다. 반대로 포먼은 계속해서 알리를 두드린다.

7회 시작과 함께 걸어 나오는 포먼의 다리는 공격하다 지쳐 많이 풀려 있었다. 알리는 잽과 스트레이트로 상대를 유혹하며 1회부터 그랬듯이 계속해서 상대를 도발한다. “조지 너의 주먹은 솜방망이와 같다. 넌 날 절대 이기지 못해.” 이에 분개, 포먼은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른다.

운명의 8회, 알리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로프를 등지고 조지를 자극한다. 이번 회에서 끝장을 볼 듯이 포먼은 맹렬하게 공격한다. 라운드가 끝나기 30초 전, 로프를 등지고 있던 알 리가 찰나의 순간 라이터 훅으로 포먼의 관자놀이에 명중시키자마자 로프를 빠져 나오면서 원투스트레이트 4방이 포먼의 안면에 적중한다. 포먼은 거대한 고목이 쓰러지듯 빙글 돌면서 캔버스에 드러눕는다. 알리의 8회 KO승.

인류 최고의 하드 펀치, 무적함대 조지 포먼의 침몰이었다. 이날 알리의 승리를 두고 세인들은 ‘킨사샤의 기적’이라 부르며 두고두고 이 시합을 추억했다.

포먼은 알리에게 패한 후 은퇴했다가 20년 후 복귀하여 세계 챔피언에 오르며 복싱팬들을 경악에 빠뜨리게 한다.

알리는 포먼에게 승리 후 “나의 벨트를 되찾아 오는데 7년의 세월이 걸렸다. 나는 당신(백인)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될 것이다.” 며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인종차별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1975년 3월, 1차 방어전에서 척 웨프너를 15회 KO로 제압하고 동년 10월, 숙명의 라이벌 조 프레이저와 필리핀 마닐라에서 2차 방어전을 치러 14회 TKO로 챔피언 자리를 지켜낸다. 

이날 시합이 끝난 후 “만약 14회 시작과 동시 조(프레이저)가 시합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내가 포기했을 것이다.”며 그날의 시합이 얼마나 처절한 혈투였는지 알 수가 있었다.

1976년 알리는 일본무도관에서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일본의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격투 대결에서 무승부를 기록하기도 한다.

1978년 2월, 알리는 무명의 복서 레온 스핑크스에게 챔피언 벨트를 내어준다. 그로부터 1년 후 재대결에서 설욕하고 헤비급 역사상 전무후무한 3번째 왕좌로 등극한다.

달이 차면 기우는 것이 세상이치, 위대한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알리는 1년 후 홀연히 은퇴를 선언하고 타이틀을 반납한다.

1980년 주변의 성화에 컴백하여 자신의 과거 스파링 파트너였던 래리 홈즈에게 도전하지만 10회 TKO로 지고 만다. 이 후 트레버 버빅과 한차례 더 시합을 가지지만 역시 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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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7월 알리는 21년간 자신의 무대였던 사각의 정글을 뒤로 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다. 

팬들에게 위대한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을 각인시켜 놓고 금메달을 다시 찾은 알리.

1996년 7월 19일 복싱의 후유증인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던 알리가 애틀란타 올림픽 최종 성화 점화자로 등장, 전 세계 팬들에게 다시 한번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 해 알리는 36년 전 세상을 향해 던져 버린 금메달을 다시 돌려받는다.

20세기 최고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 그는 반전 운동가이자 흑인 인권운동가였으며 시련과 고난에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용사였다.

21년 동안 세운 그의 기록에는 그 누구의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시련이 스며있었다. 

또한 그는 또한 고난을 달게 받았던 신념이 함께 했기에 알리를 우리는 20세기 최고의 복서이자 최고의 스포츠맨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 세계 스포츠팬들은 그를 스포츠계의 자존심으로 평가 하고 있는 것이다.

생애 통산 전적  61전 56승(37KO) 5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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