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더급 최장방어 기록 ‘검은 여우’ 에우제비오 페드로사

페더급 최장방어 기록 ‘검은 여우’ 에우제비오 페드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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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왕과의 타이틀매치

 1980년 7월 20일 서울 장충체육관 WBA 페더급 세계타이틀매치.

챔피언 파나마의 ‘검은 여우’ 에우제비오 페드로사, 이에 맞선 도전자는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하드펀치 김사왕.

페드로사의 9차 방어전이었다. 당시 세인들은 도전자 김사왕을 무하마드 알리의 쇼맨쉽과 조지 포먼의 펀치력 그리고 마빈 헤글러의 맷집을 가지고 있는 전사로 추켜세우고 있었으며 당연히 그가 비쩍 마른 챔피언을 링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맹주에 오르길 고대하며 구름같이 몰려 장충체육관을 메우고 있었다.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고 채 1분도 지나기도 전에 세인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다. 챔피언 패드로사의 신공에 쩔쩔매는 도전자를 보며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비무시합이라고 직감한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보고 모두의 등줄기에 오싹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래도 세인들은 믿었다. 김사왕이 누구던가. 13전승(10KO)에 빛나는 화려한 캐리어에 상대가 누구든지 절대 주눅 들지 않고 언제나 막판의 승자는 그가 아니던가.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페드로사는 화려한 잽과 좌우 콤비네이션으로 도전자를 어린애 취급하듯 가지고 논다.

7회, 강력한 라이트가 도전자의 복부를 강타한다. 꽤 큰 충격을 받았으나 도전자는 배를 내밀며 더 쳐 보라고 호기를 부린다.

8회, 시작과 동시 도전자는 좌우 연타를 휘두른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챔피언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거기까지가 도전자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1분 후 그는 패드로사의 복부공격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하염없이 장충체육관 천정을 보라보며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카운트아웃이 된다. 역시 매에 장사 없었다.

다음 날 어느 조간신문에 이렇게 적혀있다. ‘움직이는 샌드백 김사왕 8회 KO패로 타이틀 획득 실패’ 한마디로 미스 매치였다. 그렇게 챔피언의 강력함만 증명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한때는 세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김사왕은 몇 차례 의미 없는 시합을 치르고 은퇴 후 신문의 스포츠면이 아닌 간혹 사회면을 장식하다 지인에게 살해당하며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다.

에우제비오 패드로사는 1956년 3월 2일 파나마의 수도 파나마시티에서 태어났다. 그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 훌리오 가르시아를 4회 TKO로 제압하고 밴텀급으로 강호에 이름을 내민다.

페드로사는 승승장구한다. 1974년 9월까지 9연승(6KO)으로 순항하다 그 다음해 알폰소 페레즈에게 3회 KO패로 불의의 일격을 맞는다. 2회까지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다가 페레즈의 마구잡이식으로 휘두른 펀치 한방에 나가떨어진다. 강호를 떠날 때까지 두고두고 자신을 괴롭히게 되는 ‘유리턱’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약관의 젊은 페드로사는 절망하지 않는다. 용수철처럼 다시 일어서서 파죽의 5연승(3KO)을 달린다.

페드로사에게 데뷔 3년 만에 첫 번째 기회가 찾아온다. 상대는 멕시코가 자랑하는 WBA 세계밴텀급 챔피언 ‘작은 포식자’ 알폰소 자모라였다.

자모라는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테크니션 홍수환을 4회에 박살내고 맹주에 오른 뒤 2차 방어를 마친 상태였다. 이때까지 자모라는 만화에서나 나 올 법한 24전승 24KO승의 전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자모라의 홈 링 멕시코에서 벌어진 타이틀매치는 너무나 허무하게 페드로사가 자신의 무공을 채 펼치기도 전에 2회 1분 2초 만에 자모라가 자랑하는 레프트 훅 한방에 꼬꾸라진다. 카운트아웃 되기 전에 일어서지만 주심은 경기를 중단시킨다.

첫 번째 천하제패의 꿈이 허망하게 사라진 후 3개월 뒤, 페드로사는 오스카 아르날에게 6회 KO패로 또 다시 일격을 당한다. 이번에도 체중 감량고에 시달리다 억지로 링에 오르다 변을 당한 것이었다.

페드로사는 고심을 거듭하다 결국 체급을 올리기로 결심한다. 두 체급 위인 페더급으로 전향한다.

체급을 올린 뒤 계체량의 공포에서 벗어난 페드로사는 물 만난 고기마냥 3연승(2KO)을 수확한다.

두 번째 천하제패의 기회가 찾아온다. 상대는 스페인의 강타자 세실리오 라스트라. 페드로사 홈 링에서 열리지만 자국민은 미스 매치라며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잘 나가다가 약한 ‘유리턱’ 때문에 한방에 나가떨어지는 스타일에 세인들은 싫증을 내고 있었다.

텅 빈 관중속에서도 시합은 속개해야 했다. 1978년 7월 2일 파나마시티 WBA 세계페더급 타이틀매치.

챔피언 라스트라가 28전 26승(17KO) 2패, 도전자 페드로사는 20전 17승(11KO) 3패의 전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세인들에게 버림당하고 절대적으로 열세라는 예상 속에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지금까지 세인들이 알던 페드로사가 아니었다.

챔피언 라스트라의 묵직한 좌우연타에 맞서 때로는 난타전을 때로는 적절한 아웃복싱으로 상대를 유린한다. 지금까지 꽁무니만 빼던 페드로사와는 전혀 다른 선수로 변해있었다. 이 모두가 체중 감량고에서 해방된 뒤 컨디션 조절에서 오는 산물이기도 했다.

13회, 시작과 동시 도전자의 좌우 연타가 그림처럼 상대방의 안면에 꽂힌다.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라스트라를 향해 페드로사의 펀치가 융단폭격처럼 퍼붓자 주심이 더 이상은 무리라며 페드로사의 승리를 선언한다.

강타자 라스트라를 잠재운 뒤에도 세인들의 냉대와 멸시는 끊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 두 차례 방어하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맹주에 오른 페드로사는 전혀 다른 전사로 탈바꿈한다. 방어적인 스타일에서 호전적인 스타일로 180도 바뀐다. 그리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페더급 역사상 전무한 19차 방어 대기록을 세운다. 전 세계를 오가며 그가 통치한 기간은 무려 7년 2개월에 이른다.

맹주에 오른 뒤 3개월 후 자국 파나마에서 어네스트 헤르나를 12회 TKO로 제압하고 가볍게 1차 방어를 통과한다.

이후 페드로사는 순풍에 돛단 듯이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 한다. 앤리케 솔리스를 15회 판정으로 제압하고 이어 일본의 강타자 로얄 고바야시를 13회에 내려 앉히고 핵토르 카라스쿨라 마저 11회 레프리 스톱으로 4차 방어를 가볍게 넘는다.

승승장구를 계속하는 페드로사를 바라보며 세인들은 그가 지난 날 알았던 ‘유리턱’ 페드로사가 아님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페드로사는 5차 방어전에서 보란 듯이 멕시코의 괴물 루벤 올리바레즈를 12회에 날려 버린다. 계속해서 조니 아바를 11회에 보내고 스파이더 네모토를 15회 접전 끝에 판정으로 제압한다. 그렇게 7차 방어 고지를 점령한다.

이제 세인들과 강호인 그 누구도 맹주 페드로사를 업신여기지 않는다. 비로소 페드로사 스스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절세무공으로 진정한 맹주임을 증명하였다. 이때부터 세인들은 그를 가리켜 링 위의 ‘검은 여우’ 혹은 ‘전갈’이라 부르며 칭송한다.

거칠 것이 없는 페드로사는 후안 말바레스, 김사왕을 차례로 9회 그리고 8회에 요절내며 9차 방어까지 완료한다.

3명의 전 세계챔피언 로키 록크리지, 패트릭 포드, 후안 라포르테 마저 박살내며 전직 세계챔피언 킬러로 명성을 날린다.

그리고 카를로스 피앙코, 바시우 시바카를 차례로 제압하고 14차 방어의 벽을 넘은 페드로사는 이제는 전설이 되어 가고 있었다.

1982년 10월 기교파 베르나도르 테일러에게 고전 끝에 무승부로 15차 방어에 성공한다.

영원한 제국이 없듯이 강호 역시 영원한 일인자는 없다. 그렇게 페드로사의 내공도 쇠진해 가고 있었다. 6개월 후 로키 록크리지와 접전 끝에 16차 방어에 성공하지만 예전의 페드로사가 아니었다.

호세 카바, 엔젤 메이요, 조지 루한을 파괴력이 아닌 노련한 경기운영으로 차례로 15회 판정으로 돌려 세우고 19차 방어라는 찬란한 금자탑을 세운다. 이 기록은 페더급에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그렇게 페드로사에게도 자신이 구축한 왕조의 몰락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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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사를 무너뜨린 멕기간

 1985년 6월 8일, 페드로사는 20차 방어전에서 무명의 베리 멕기간에게 15회 판정으로 맹주의 자리를 내어 준다.

이후 그는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지만 3승 2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1992년 11월, 파란만장 했던 사각의 캔버스를 뒤로 하고 은퇴를 선언한다.

에우제비오 페드로사, 그는 세인들의 멸시 속에서도 노력과 자신의 신체조건에 맞는 스타일을 개발하여 야유를 환호성으로 바꾼 페더급의 전설의 제왕이었다.

또한 자신이 치른 스물 한 번의 세계타이틀 매치 중 열다섯 번은 원정 시합이었다. 그는 홈텃세에 의존하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자신의 왕국을 구축하였다.

생애 통산 전적  49전 41승(25KO) 1무 6패 1노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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