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중량급(重量級)의 전설, ‘돌주먹’ 박종팔
-가난을 이겨내고 스스로 일어선 불굴의 전사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해 전 재산을 탕진, 극단적인 선택의 귀로에서 새로운 인연(因緣)을 맺어

전라남도 무안 수반마을 감방산 정상, 약관(弱冠)이 채 되지 않은 한 소년이 신안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먼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장대한 기골은 한눈에 보아도 천무지체(天武之體)을 타고난 전사, 그 자체였다.
이 소년이 바로 동양인들에겐 불가침으로 여겨졌던 세계 슈퍼미들급 2개 기구를 석권한 대한민국의 자랑, 박종팔이였다. 세인들을 그를 ‘돌주먹’ 또는 ‘불굴의 전사’라고 불렸다.
박종팔은 1958년 8월 11일, 무안 박씨의 집성촌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매곡리 수반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년시절,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새어머니를 맞았는데 아마도 이 때문에 순탄치 못한 분위기에서 생활해야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무작정 상경한다. 낯선 타향에서 살아남기 위해 뭐든 해야 했다. 중국집 배달원 등 온갖 잡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다 어떤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불연 복싱 명문 동아체육관의 문을 두드린다.
당시 동아체육관 김현치관장은 박종팔의 재능과 성실함 또, 복싱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겠다는 헝그리 정신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1977년 11월 26일, 박종팔은 부산에서 정영수를 3회에 침몰시키고 험난한 강호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MBC 신인왕이 된 직후 강흥원에게 일격을 당하지만 98년 12월 17일 최창백을 3회에 주저앉히고 한국 미들급 왕좌에 오른다.
박종팔은 신이 뻗친 듯 내달린다. 강호 입문 12전째, 일본의 케시어스 나이토를 2회에 패대기치고 동양태평양(OPBF) 타이틀을 거머쥔다. 이후 12연속 KO승 가도를 달린다. 열 번의 타이틀방어와 두 번의 논타이틀전이었다. 동양에선 적수가 없었다. 박종팔은 일본의 고지마 가즈오로부터 시작해 풀헨시오 오벨메히야스에게 패할 때까지 19연속 KO승을 장식한다. 이는 백인철의 26연속 KO승에 이은 국내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세계로 눈을 돌린 박종팔의 상대는 양대기구를 한 손에 쥐고 있는 미들급의 절대지존 미국의 ‘링 위의 도살자’ 마빈 헤글러였다. 그 전에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었다. 베네수엘라의 풀헨시오 오벨메이야스 였다. 사실상 헤글러 아성에 도전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 오벨메히야스는 박종팔과 대전하기 전 34승(31KO)승 1패의 전적이었다. 1패는 지존 헤글러에게 당한 8회 KO패였다. 박종팔은 22승(21KO) 1무 1패의 전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1981년 11월 7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치러 진 논타이틀전에서 박종팔은 8회까지가 한계였다. 8회 시작과 동시 채 1분이 되기 전 라이트 스트레이트에 침몰하고 만다. 박종팔은 세월이 흐른 뒤 1988년 5월 23일, WBA 세계슈퍼미들급 챔피언으로서 도전자 오벨메히야스와 맞붙지만 12회 판정으로 지존의 자리를 내어준다. 그는 생애 다섯 번의 패배 중 두 번을 오벨메히야스에게 당한다.
오벨메히야스 패한 후 멀어진 헤글러와의 대전을 위해 박종팔은 다시 일어선다. 마나 프램차이를 시작으로 나경민과의 경기전까지 6연속 KO승을 장식한다.

호시탐탐 천하를 노리는 박종팔에게 뜻밖의 살수가 나타난다. 그는 아마에서 충실한 기본기와 강렬한 파워를 장착하고 나타난 신성 나경민이었다. 아마전적 88승(76KO) 8패의 화려한 발자취를 남기고 강호 입문 후 11연승(11KO)를 달리고 있었다. 세인들은 그의 훅과 라이트 스트레이트는 미들급의 전설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몬존의 피괴력에 비교하기도 했다.
1983년 5월 29일 서울 문화체육관 동양태평양(OPBF) 타이틀매치. 세인들은 양웅(兩雄)의 대전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라운드 시작 초반 나경민의 훅에 박종팔이 다운당한다. 충격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리 만큼 박종팔의 움직임은 평상시와 달라 보였다. 이후 간헐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7회에 들어 나경민의 맹폭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그것도 4번이나 나경민의 무공에 바닥에 뒹굴어야 했다. 3년을 지켜 온 동양의 맹주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시합 후 밝혀진 내용은 이랬다. 연습 부족으로 인한 체중 감량 실패. 상대를 얕본 혹독한 대가이기도 했다.
절치부심(切齒腐心),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박종팔은 재대결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동년 9월 4일. 같은 장소에서 동양 챔프 타이틀을 걸고 그들은 다시 맞붙는다. 준비된 박종팔은 확연하게 달랐다. 초반부터 빠른 몸놀림으로 상대의 펀치를 무력화시키며 근접전으로 끌고 갔다. 나경민 역시 위대한 전사답게 피하지 않고 맞불 작전으로 파이팅을 벌였다. 입추에 여지없이 경기장을 가득 채운 세인들의 함성으로 시합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나경민은 살인적인 훅과 스트레이트를 난사하고 있었다. 반면 박종팔의 해머 같은 주먹이 상대의 복부에서 얼굴로 이어지는 콤비네이션 선보이고 있었다. 이때까지 유효타에서 우위를 점한 박종팔은 끊임없이 자신의 주 무기인 바디샷을 지속적으로 퍼붓고 있었다.
운명의 4회, 박종팔의 지겨운 바디샷에 데미지를 입은 나경민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초반, 바디 연타를 허용한 나경민이 첫 다운을 허용한다. 상처 입은 먹잇감을 본 박종팔은 상대를 로프에 몰아붙이며 난사한다. 결국, 로프를 붙잡고 주저앉으며 두 번째 다운을 당한다. 세인들은 박종팔의 승리를 예감한다. 이를 악물고 일어선 나경민의 복부에 마치 해머를 박듯 묵직한 레프트가 꽂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경기는 국내 라이벌전이 흥행할 수 있다는 이정표를 남긴 사례가 되었다.
이후 박종팔은 한차례 동양 타이틀을 방어한 후 슈퍼미들급으로 체급을 올린다. 그의 타켔은 신생 복싱기구 IBF 슈퍼미들급의 지존이었다. 체급을 바꾼 그는 3연승(2KO)으로 다가올 경기에 대한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긴 인고의 시간을 보낸 박종팔에게 마침내 천하 제일인의 기회가 찾아왔다. 신설된 슈퍼미들급 왕좌결정전. 상대는 머레이 서들랜드. 큰 키와 긴 리치를 자랑하는 그는 42승(35KO) 11패 1무의 전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적에서 보듯 패가 많기는 해도 펀치의 파괴력 하나만은 일품이었다.
1984년 7월 22일 서울 장충체육관. 동양인으로선 전입미답(前人未踏)의 길을 가는 전사의 앞날을 성원하기 위해 세인들은 경기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작을 알리고 공이 울리고 긴 리치를 앞세운 서들랜드는 턱밑으로 파고드는 박종팔의 접근을 결사적으로 저지하고 있었다. 쉽사리 풀리지 않은 초반, 박종팔은 서들랜드의 레프트 훅을 허용하며 그대로 쓰러진다. 일어선 그는 위기상황을 모면한다. 체력적으로 앞선 박종팔은 경기 중반에 승부수를 던진다. 체력적으로 부담이 가중되어 가는 중반부터 끊임없이 복부를 공격한 결과, 서들랜드를 4번이나 바닥에 패대기치며 11회에 마침표를 찍는다.
지존에 자리에 오른 박종팔은 8명의 살수로부터 지존의 자리를 지켜낸다. 특히, 그중 3차 방어 비니 커토와의 경기는 미국 LA 스포츠 아레나에서 맞붙는다. 박종팔은 난타전 끝에 15회 KO로 장식한다. 이때의 승리는 한국복싱 ‘유일한 미국 원정 타이틀매치 승리’였다. 이 시합 후 그는 미련 없이 지존의 자리를 벗어 던진다.

이유는 명확했다. 그의 야망은 유서 깊은 WBA 타이틀로 향하고 있었다. WBA가 슈퍼미들급을 신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87년 12월 6일 부산사직체육관. WBA슈퍼미들급 챔피언 결정전, 상대는 19승(18KO) 1패의 멕시코의 신성 헤수스 가야도르였다.
경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박종팔은 불의의 일격을 허용 한차례 다운을 당 하지만 다시 일어선 그는 가야도르를 쉴새 없이 윽박지른다. 풋내기에게 다운당한 분풀이라도 하듯 인정사정이 없었다. 다운 그리고 또 다운. 이미 가야도르는 동공이 풀려있었다. 보다 못한 주심이 시합을 종료시킨다. 2회 TKO승이었다. 박종팔에게 있어 생애 두 번째 슈퍼미들급 기구를 석권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박종팔에게 어둠이 짙어 오고 있었다. 한차례 방어전을 치른 후 다시 만난 오벨메히야스를 상대로 치른 2차방어전에서 두 차례나 다운을 당하며 판정패로 지존의 자리를 내어준다. 이후 국내 최고의 하드펀치 백인철과의 라이벌전에서 9회에 주저앉으며 파란만장했던 강호를 뒤로하고 은퇴를 선언한다. 그때가 1988년이 저물어 갈 때였다.
박종팔은 은퇴 이후, 그가 쌓은 위대한 업적에 비해 제2의 인생은 순탄치 못했다. 탄탄대로 일 것만 같았던 그의 인생은 믿었던 이들에게 투자 사기를 당하며 벼랑 끝까지 내몰렸고 그동안 모아 놓은 재산을 탕진, 거기에 더해 아내마저 사별하고 만다. 그 여파로 대인기피증을 겪으며 극단적인 생각를 하기도 했지만 신의 선물과도 같이 나타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그녀와 함께 아름다운 자연에 묻혀 집을 짓고 사시사철 농작물을 수확하며 노후의 삶을 보내고 있다.
종편채널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전사 박종팔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방영하기도 했다.
박종팔, 그는 중량급 전사치곤 빠른 스피드와 연타 능력 그리고 파괴력 있는 주먹을 선보이며 세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동양인들에겐 불모지라 다름없는 중량급(重量級)에 도전, 지존의 반열에 오르면서 이정표를 아로새겨 놓았다.
세월이 흐른 후 박종팔은 IBF 30년을 빛낸 챔피언에 선정되면서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았다.
박종팔의 은퇴 후 37년이 지난 지금, 그가 떠난 이후 이 체급은 동양인들에겐 신성불가침으로 남아 있다.
생애통산전적 53전 46승(39KO) 1무 1무효 5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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