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나의 인생이야기 ‘고현동 717번지 사진사’ 강응현

삶, 나의 인생이야기 ‘고현동 717번지 사진사’ 강응현

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민초(民草)들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사랑하고 꼭 지켜야 할 사람들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 온 그들의 삶, 그 인생이야기를 지면에 담고자한다.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군가의 형제, 자매 그분들의 인생여정을 적어 남기고자 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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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시청을 출입하는 기자들은 그를 모르면 간첩이다. 단체장이 바꿔도 끝임 없는 인사에도 늘 한자리만 지키고 있는 이가 있다. 그가 바로 고현동 717번지, 거제시청 사진사 강응현씨다.

97년부터 마치 자신의 집 인양 그 자리에 짐을 풀고 앉았다. 올해로 25년째다. 당시 문화공보과 공보계, 지금은 공보담당관실이다.

처음부터 그는 시청전속사진사가 아니었다. 1987년 거제군청 당시 농촌지도소 농촌지도사 10급 사무보조원으로 공직을 시작했다. 그때 그의 주 업무는 식량, 작물, 병해충 예찰원이였다.

응현씨는 1963년 장목 율천에서 5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 없었다. 그래서 맨주먹으로 가정을 돌봐야 했다. 소작농부터 시작했다. 농사철에는 논에 묻혀 살고 농한기에는 속칭 ‘꼬돌이’ 배 선원으로 밥벌이를 이어 갔다.

응현씨가 대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진학할 무렵 3년 터울인 그의 형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학비 걱정에 차남인 응현씨의 중학교 진학을 보류한다. 가부장적인 그의 부모는 장남, 맏아들이 우선이었다. 그때는 중학교가 의무교육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차남이라는 사실이 지금까지 두고두고 그를 서럽게 한다.

1년을 막일로 때우다 그는 장목중을 거쳐 거제종고(현 경남산업고)를 졸업한다. 그 시대를 살아 온 거의 모든 군상들이 그러하겠지만 우선 배고픔으로 부터의 해방이 우선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딱히 공부에는 자신이 없던 그는 곧바로 대우조선에 입사, 1년 반을 노동자로 재직 하던 중 국가의 부름을 받아 입대한다. 근무처는 39사단 예하 해안3대대 장목 시방초소였다. 18개월간의 군복무 후 부산에서 2년 정도 노동자로 근무하다 1987년 사무보조원(예찰보조원)으로 거제시청과 연을 맺는다.

그가 농촌지도사로 근무하던 1994년 두 살 아래인 김미자씨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다음 해 딸을 얻고 2년 후 아들이 태어난다. 이제 지켜야 할 가족이 생긴 그는 논으로 밭으로 종횡무진하며 예찰원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가족을 부양하며 근검절약이 몸에 베인 그는 부친의 소작농 설움을 풀어주고자 적금이 만료되면 그 돈과 대출을 더해 아버지께 토지를 사 들였다. 하지만 부친은 땅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아니 차남이 주도 하는 것이 마음에 차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어느덧 공직에 발들인지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 날 문화공보과 예술계로 발령이 난다. 정식 9급 임명과 함께였다. 직능은 기계직이었다. 그때가 1997년 정월이었다.

1년 후, 공보계 사진담당이 정년퇴임하면서 평소 사진에 취미를 갖고 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던 응현씨를 그 후임으로 발탁한다. 사진사의 시작이었다.

정신없이 바빴다. 취미로 하던 동호회 활동과는 천지 차이였다. 캡틴이 움직이면 그 자리엔 어김없이 응현씨가 있었다. 일거수일투족을 찍어야 했다. 지금처럼 촬영 후 사진을 확인해 가며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그땐 디카가 없었다. 파김치가 되어 복귀하면 그는 암실에 박혀 현상을 해야 했다. 언론 마감에 맞춰 사진을 배달해야만 했다.

되풀이 되는 일상 속에서 때론 특종을 노린 기자들에게 속아 필름을 인터셉트 당한 것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래서 과장에게 조인트 까진 적도 많았다.

지금이야 출장비가 있지만 그땐 차량, 경비 등 모두 사비로 처리해야 했다. 가득이나 어려운 살림에 업무가 발목 한 끗을 잡고 있었다.

한일 월드컵이 끝난 그 다음 해 2003년, 전국을 휘젓고 간 태풍 ‘매미’가 있었다. 당시 전국에서 거제가 가장 큰 데미지를 입었다. 응현씨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몸서리를 쳤다. 현장을 돌아다니며 대자연의 공포를 렌즈에 담았다. 말로 형언 할 수 없었다. 휩쓸고 간 자리, 복구에 안간힘을 쓰는 모두의 땀방울을 담았다. 그 역시 몸도 마음도 지쳐 갔지만 그 모든 것을 후세에 남겨야 했기에 이를 악물고 버터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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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 인터넷이 활성화 되고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면서 점차 사진업무도 간결해 지면서 전보다 수월해 진 것은 사실이었다.

2014년 응현씨는 직능에 자리가 하나 늘면서 6급 주사로 승진한다. 여기까지였다. 그의 직능에 사무관 자리는 없었다.

몇 해 전 그와 항상 죽이 맞았던 막내가 인근 조선소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떴다. 지금도 소주잔을 기우리다 막내 이야기가 나오면 눈시울을 붉힌다. 그래서 자신은 동생을 가슴속에 묻고 산다고 한다.

그는 다섯 명의 단체장의 시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수십만 장의 사진을 셔터에 담은 그였지만 정작 자신의 사진은 별로 없다. 사진사는 타인을 담아야 한다. 자신은 그 역할만 충실하면 된다고 했다.

강응현, 그가 카메라에 담아 온 세월이 곧 거제시의 역사이다. 이제 그는 내년 6월이 공직생활 종착역이다. 36년의 세월이었다. 그의 꿈은 소박하다. 내 가족이 지금처럼 항상 건강하고 화목하게 지내면 된다고 한다.

투박한 손, 항상 넉넉한 웃음 끼 있는 얼굴,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소주한잔 하는 것을 일상의 기쁨이라 했던 그가 떠난 다음 시청을 오르내리는 그를 아는 모든 이가 추억하며 그리워 할 것이다.

 

 

 

 

 

 

허기실 기자 (geojenewswid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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