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외길 인생 ‘거제뉴스아이 대표 윤광룡’
윤광룡, 그는 속칭 지역 언론의 터줏대감이다. 1990년 동남일보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33년 신문쟁이 외길로 달려왔다.
그가 딱 한 번 주간 잡지사에 근무하면서 잠깐 치킨집을 병행한 적이 있었다. 게으른 그가 투잡을 한 것에 대해 믿기지 않지만 그건 사실이다. 외도(外道) 아닌 절반 정도 외도인 셈이다.
그는 1967년 하청면 신동에서 태어났다. 농협에 근무했던 부친과 흔히 말하는 방석집을 운영했던 모친 사이 2남 3녀 중 차남이다.
부친은 필자도 여러 차례 뵌 적이 있다. 그 연세에 수려한 외모와 훤칠한 키는 단연 또래 영감들에 비해 돋보였다. 농협을 그만두고 농사일을 하며 마을 이장까지 도맡아 가며 열심히 일한 덕에 윤대표는 유년시절 어려움 없이 성장했다. 물론 모친의 자영업이 한몫을 했다. 이젠 오래된 일이지만 그는 간혹 술자리에서 귀천(歸天)한 모친과 부친에 대한 그리움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윤대표는 예술적 방면에 재능이 있었다. 하청초 시절 밴드부의 일원으로 거제교육청 주최 학예발표회에 참가 4-5학년때 최우수상, 6학년에 우수상에 빛난 경력이 있다. 그가 맡은 악기는 북(중북)이었다. 또 거제상공회의소, 옥포대첩기념사업회 주최 사생대회에서도 입상 한 바 있다.
오래전 필자는 윤대표의 은신처에 가보고 어마어마한 책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도서관에서 거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 것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하청중학교에 진학한 그는 그 시절 수업에 필수교재였던 과목별 차트를 도맡아 만들었다. 타고난 다재다능한 자질을 개발했다면 과연 지역 신문쟁이로 남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것 또한 인생이 아니던가.
중학교 재학 중 그는 창원기계공고에 합격한다. 당시 특성화 고등학교였던 창원기공은 내신 성적 10% 이내에 들어야만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전국 고입시험보다 먼저 치러지기 때문에 합격 여부가 빨리 결정되었다. 과거를 회고한 그는 시험 빨리 보고 남들 공부하는 시간에 놀고 싶어 창원기공을 선택했다하니 학교생활이 그리 오래 갈 리 없었다.
하청중에서 열 명이 창원기공에 응시 네 명이 합격할 정도로 어려운 난코스를 통과했음에도 불구 두 달 남짓 다니다가 돌연 아버지를 졸라 해성고로 전학하게 된다. 스스로가 제도, 용접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고 밝히면서도 갑자기 공부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시 방산업체로 유명한 창원 소재 동양정밀주식회사(OPC)에 근무하다 조국의 부름을 받아 1988년 7월 입대한다. 그의 소속부대는 39사단 예하 해안3대대 9중대였다. 9중대는 단기사병에겐 지옥과도 같았다. 이른바 전투방위였다.
1990년 정월, 마침내 그에게도 제대라는 날이 왔다. 창원으로 달려간 그는 디자인학원에 등록,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다. 면학에 집중한 지 수개월이 지날 즘 학원장의 추천으로 창간 준비 중이던 일간 동남일보에 편집기자 요원으로 응시, 합격한다. 신문쟁이의 시작이었다.
입사한 지 3년이 지날 무렵 거제신문사로 자리를 옮긴다. 몇 년이 지날 즘 경영진과의 마찰로 사표를 던진다. 급한 성격 때문이었다. 이후 통영신문에 잠시 몸담았다가 새한려신문 창간 요원으로 재직하다 1999년 급여 미지급으로 사직, 2000년 새거제신문 창간과 동시 합류하게 된다.
2004년, 그는 새거제신문을 떠난다. 이후 모닝뉴스, 거제신문에서 알바를 하다 주간 잡지 위클리 거제에 적을 두다가 휴간되면서 2011년 지금의 거제뉴스아이를 창간하고 본인이 발행인이 된다. 돌이켜 보면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엔 각 언론사가 재정적으로 열악했다. 그가 사직한 이유 대부분이 급여 미지급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지역 언론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경의를 보낸다.
윤대표는 지금도 미혼이다. 환갑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에게는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가 있다. 9년을 넘게 서로 사랑했지만 가족의 반대로 맺어지지 못했다. 아마 지금도 그 사랑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까지 혼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독한 순정파인지도 모른다. 그녀와 결별한 이후 그가 연애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정이 많다. 그래서 눈물도 많다. 예술을 사랑하고 책 읽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지독한 습관도 줬다. 언론에 종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술자리에서 봉변을 당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가 거제신문 재직 시 직원 회식 자리에서 술이 몇 순배 돌고 난 후 대표이사가 일종의 훈시 아닌 훈시에 한참 열을 올리고 있을 때 그는 술을 몇 잔 연거푸 들어붓고 난 뒤 대표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자르며 “어이, OOO, 고만 씨부리라. 니 마이 컷네.” 지금도 그때의 에피소드는 전설로 남아 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시절에 비하면 많이 부드럽게 바뀐 셈이다.
윤광룡, 우리는 그가 언론의 길, 신문쟁이의 길을 언제까지 걸어갈지 모른다. 하지만 긴 세월 그가 남기고 간 흔적은 옛 종이 신문에도 온라인 매체 곳곳에 남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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