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민의 풍물기행...양화마을‘별신굿’
추석다음날인 지난11일, 거제시일운면 망치리 양화마을에서 남해안별신굿보존회가 주관하고 문화재청, 한국문화재단, 국립문화유산원이 후원하는 ‘양화마을 별신굿’공연이 펼쳐졌다.
양화마을은 인근구조라, 망치, 수산, 다대, 죽림마을 등 과거별신굿이 크게 연행했던 곳으로 마을공동체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시대의 변화와 흐름으로 1989년을 마지막으로 별신굿이 열리지 않다가 마을문화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던 채봉식이장과 주민들이 별신굿을 보존하려는 강한의지로 33년 만에 다시 열렸다.
별신굿에 초빙되어 온 국악인도 20명이나 된다. 이들은 ‘남해안 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 제82-4호)’예능보유자인 정영만(67)씨가 이끈다.
오늘의 공연은 인간문화재‘정영만’의 진행에 따라 무당들의 도착을 알리는‘길 군악’, 마을주민의 안녕과 평온을 기원하는‘들맞이 당산굿’, 어업의무사함과 풍어를 기원하는‘용왕굿’ 마을의 모든 액을 다 가지고 좋은 곳으로 떠나라는 시석(거리굿)의 순서로 이어졌다.
한반도의 남쪽 해안 거제도에서 전해오는 ‘남해안별신굿’은 강신무들이 주재하는 굿이 아니라 예인(藝人)들이 세습해온 굿으로, 풍어와 마을의 안녕, 마을사람들의 평안을 기원하는 일종의 커다란 축제다.
요즘 서구화와 개발바람에 밀려 남해안갯마을들에서 별신굿이 차츰 사라지고 있는데 비해 양화마을별신굿 행사에는 전혀 그 색깔이 바래지 않고 있다. 이는 억센 바다가 있고 거기에 기대어 위로받아야할 삶이 아직 건실하게 남아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수많은 세월동안 남해의 거친 바람과 파도를 온몸으로 헤쳐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을 어루만지고 감싸 안아준 남해안별신굿.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굿이라는 축제를 통해서 삶의 원동력을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방법을 잊어버렸다.
건조해져 바스락 바스락 부서져버리는 삶에는 탄력이 사라지고 있다. 삶이 생명을 잃어감에 따라 그 삶을 지탱하는 무의식인 축제역시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자연스럽게 세습무 집안의 명맥도 점점자취를 감춰간다. 그 핏줄의 희미한 끄트머리에 정영만(남해안별신굿 보존회 회장·인간문화재)이라는 이름 석 자가 있다.
300여 년 이어온 무속집안계보의 오래된 유전자를 온몸에 문신처럼 감고 태어난 정영만은 그 세습무 집안에서도 특별한 두각을 나타낼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말을 익히기 전부터 음악이라는 언어를 지니고 있었을 그는 남해안별신굿을 멸종되어가는 어느 생물체처럼 특별히 가둬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금의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까지 그는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만 어찌 보면 그가 춤추고 노래하며 연주하고 있는 모든 순간은 이 시대의 마지막 세습무를 보고 있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안타갑기도 하고 소중하기도 하다.
“굿하기가 싫어 한때 선원생활도 해보고 택시운전도 했습니다만 결국 돌아왔습니다. 전통을 이어감은 학교 배움보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서 이뤄지나 봐요. 11대에 걸친 가업을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여겨집니다.”
경남통영시산양면 풍화리에서 태어난 정영만 선생은 당시 예기양성소였던 통영권번에서 유아시절을 보냈다. 기초예능을 눈으로 익히고 굿판을 따라 다니며 잔삭다리(작은굿)를 자연스럽게 배웠다. 소년시절부터는 할아버지, 고모할머니, 이모할머니, 아버지, 외삼촌으로부터 별신굿에 관한 예능일체와 무구제작 기능까지 전수받았다.
어찌 한사람의 육신 속에 이토록 다양한 기예가 깃들 수 있었을까. 남해안일대에선 정영만 선생을‘다도해의 제사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겉으로는 화려한 대무(大巫)도 성장기 자녀들에겐 마음의 상처였다. 그래도 그는 굿하는 게 창피하다며 별신굿을 멀리하던 장녀(42·정은주), 장남(39·정석진), 차남(36·정승훈), 며느리(35·공임정)를 이수자로 키워 가업을 지켜내고 있다.
한국적 리듬의 결정판 남해안별신굿, 남해안별신굿을 업으로 삼아온 정영만. 그는 무속을 하는 집안에 태어나 평생을 굿 음악에 몸 바쳐 왔다. 4살 때부터 피리와 징을 배우고 6살부터 굿판을 나섰고 별신굿가락으로 미국, 캐나다, 일본 등 해외무대에 올랐다. 거제별신굿 때문에 다대마을에서 200년 된 귀중한 자료인 ‘지동궤’를 발견해 화재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등제를 목표로 남해안 별신굿 보존에 열정을 쏟고 있다.
그런 그가 남해안별신굿 중 가장 연극적이고 음악적인 거리굿으로 이 시대의 응어리를 풀어주려 한다.
별신굿이 벌어지는 날. 양화마을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국악을 전공한 악사들이자 수제자인 아들딸들과 며느리가 무구(巫具)를 만들고, 무녀와 호흡을 맞추며 굿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비록규모는 줄었다고 하지만 양화에서 펼쳐지는 남해안별신굿은 그 재미와 예술성이 일품이었다. 마을의 당산나무 앞에서 펼쳐진 ‘들맞이당산굿’의 엄숙함에서부터 본격적인 굿판이 펼쳐지는 일월맞이를 하고 ‘골매기굿을 하러 내려오는 굿패의 행렬을 감싸 안은 어촌마을 돌담의 푸근한 정취, 남해안별신굿이 있다는 마을사람들의 정성이 가득 담긴 ’좌우밥상‘까지 어느 하나 빼놓을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남해안별신굿은 굿 그 자체의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것이 최대의 볼거리로 손꼽힌다. 꽹과리, 장구, 징, 해금, 피리, 대금으로 이어지는 장단의 풍성함과 무녀의 구성지고 수준 높은 사설은 다른 별신굿에 비해 눈여겨볼 대목들이다.
별신굿은 굿을 하는 현장과 규모에 따라 진행순서가 달라지긴 하지만 들맞이당산굿을 시작으로 일월맞이-부정굿-가망굿—제석굿-선왕굿-용왕굿-지동굿-대신풀이-군웅굿-시석(거리굿)으로 구성된다.
굿의 반주를 담당하던 산이(무악을 집안대대로 세습하는 남해안 별신굿의 악사)가 드디어 마지막 거리에 와서는 직접 일어나 마무리 굿을 진행한다. 거리굿은 산이 를 중심으로 한 타악기 연주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연주를 하면서 진행된다.
아주 기본적인 에피소드의 중심 스토리만 있을 뿐 산이 의 즉흥적인 연기로 진행되는 측면이 강하다. 내용은 대부분 행사기간동안 마을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희로애락을 나누었던 여러 귀신들을 잘 먹이고 기분 좋게 해서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무녀의 굿을 떠받치고 가락을 이끌어가며 양화마을사람들의 모든 삶의 애환과 희로애락을 뼛속 깊이 담아 굿으로 씻어내던 인간문화재 정영만이 꽹과리를 내려놓는다. 그는“해풍이 몰아치던 양화바닷가 굿판에서 언 밥과 굳은 떡을 먹으며 굿을 배우던 때를 잊지 않는다.”면서 “남해안별신굿이 세계문화유산으로 기록되는 날까지 오로지 외길을 가겠다.”고 했다.
글 : 손영민/꿈의 바닷길로 떠나는 거제도여행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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