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글〕세 갈래 물길, 삼랑진에 서다

〔아침을 여는 글〕세 갈래 물길, 삼랑진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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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다니면 길이 되는가. 길이 있어 사람이 다니는가. 길은 어느 것이나 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습관적이거나 쉽고 어려움의 차이일 것이며 선택에 용기가 필요 하느냐의 차이 일 것이다.

사무실 이사를 하였다. 집 이사보다 의미가 복잡하다. 새로운 출발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선택 앞에서는 항상 망설여진다. 수많은 갈래 길에 혼자 서서, 길을 선택하고 열어 왔지만, 때마다 마음이 심란하고 무겁다.

대학교 3학년 겨울 방학이었다. 혼란한 시대였다. 사회는 어수선했고 나의 개인사도 복잡했다. 그때 나는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정체성과 방향성에 대한 혼돈이었다. 새로운 시작이 필요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결정의 압박감이 밀려왔다. 나를 괴롭히고 싶었다. 생각이 멈출 때까지 나를 힘들게 하고 싶었다. 나만의 이벤트를 기획하고 실행하였다. 당시 내 별명은 낮도깨비였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숙모가 엉뚱하다 붙여준 별명이다.

아침 일찍 하숙집을 혼자 나섰다. 가벼운 차림에 손가방 하나, 약간의 여비를 들고 부산진역에서 밀양행 표를 샀다. 당시나 지금이나 기차는 설렘이다. 중학교 때 처음 본 기차, 밀양 송림 숲 인근으로 지나는 긴 열차를 보았을 때의 경이로움, 떨림을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겨울 들판은 황량했다. 어딜 가나 차창 밖 들판은 말라비틀어지고 생명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사막의 모래 같은 색깔들뿐이었다. 흡사 내 모습이었다. 유치환 시인의 <아라비아 사막>*의 색깔이기도 했다. 기차가 덜커덩거리며 삼랑진역에 도착했다. 이쯤에서 일단 내려서 생각을 다듬자. 이른 점심으로 선택한 자장면의 달콤함이 동심을 깨운다. 처음 접하는 것들이 모험심을 자극하였다. 어떻게 할까. 다음 차를 타고 더 북쪽으로 가볼까, 아니면 여기서 다시 돌아갈까.

지도도 정보도 없지만 걸어서 부산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을 선택했다. 여덟 시간을 혼자서 걸었다. 동네 구멍가게에 들러 길을 묻기도 하고 논두렁, 밭두렁을 넘어 조그만 동네들을 헤치고 부산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고 찾았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 유일한 단서는 선거 벽보였다. 동네 마을 마을마다 붙어있는 국회의원 선거 벽보, 그 얼굴들이 바뀔 때마다 방향을 찾아가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마침내 다른 동네를 지나 부산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당시 만난 벽보속의 미끈한 사람들이 그날 내가 만난 사람보다 더 많았다. 참 많이도 붙어있었다.

발이 불어 터지고, 물집이 잡혀도 내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내 생각과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는 두 다리가 내 몸이 아닌 독립적인 존재라 생각 들었다. 해가 진 후, 어두워진 산 중턱의 비포장도로에서 두 다리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걸음을 떼려 해도 꼼짝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내 몸이 아니었다. 몸과 정신이 따로 행동한 지 벌써 몇 시간째였다. 저녁 8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편안함이 밀려왔다. 아무런 생각도, 어떤 고민도 없는 평온함이었다. 마치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것 같은 느낌, 정신이 맑아진 느낌이었다. 여행 목적은 훌륭히 달성했다 싶었다.

그날 그 저녁을 생각한다. 약간의 공포가 느껴지던 산 중턱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고 혼자 서 있던 나에게 덜컹거리며 다가왔던 마지막 버스. 고개를 넘으니 새로운 빛으로 다가왔던 낙동강 너머의 구포. 허탈함의 연속 끝에 환희에 찬 반전. 어려움도 쉬움도 내 속에 있었던 게 아닐까. 세 물길이 모이는 삼랑진에서 구포로 방향을 잡은 것도 나 자신이고, 고개 중턱에서 주저앉지 못해 서 있던 것도 나였다. 고개를 넘었을 때 빛나던 신세계 같은 구포의 밤 풍경. 인생은 항상 반전이 있다는 것을 깨우친 혼자의 도보 여행이었다. 작은 동네 동네를 지날 때마다 느끼던 새로운 세상은 나만이 누렸던 보상이었다.

내 친구 갈매기 조나단*은 더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기를 좋아한다. 먹이를 쫓는 대신 자유와 자신만의 비행을 선택한 조나단의 비장한 고독감이 인생의 가치를 돌아보게 하는 아침이다.

길은 항상 있다. 사람이 다니기 전부터 길은 있었다. 땅에도 산에도 물에도 길은 있었다. 길은 길어서 길인지 모르나, 한 발 한 발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이 길은 확실히 있기에 선택에 두려움은 필요치 않다. 지금 내가 세 갈래 물길 위에 서 있던 그 모습일지 모른다. 자신감이 생겼다. 나에 대한 신뢰감이 생겼다. 새로운 것에 도전 할 용기도 생겼다. 젊은 시절 낮도깨비 같았던 엉뚱한 여행의 기억이 가르쳐준 담담한 길, 삼랑진에 오늘 다시 서 본다.

* 아라비아의 사막 : 유치환의 <생명의 서>에서 나오는 구절이며, 고행, 극한상황, 죽음 등을 나타내는 배경을 품고 있다.

* 조나단 :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의 주인공 갈매기

신유현

· 거제 아양 출생

· 부산대학교 상과대학 무역학과 졸업

· )삼성전자델컴퓨터, AMD 코리아 근무

)자영업

▪ 종합문예지 월간문학세계 제342회 신인문학상 수필부문 당선(20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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