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여는 글〕노신사와 노트북

〔아침을 여는 글〕노신사와 노트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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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은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젊은 지성을 판단하는 척도는 더더욱 아니다. 노트북 뒷면의 한입 물고 남은 사과 로고는 사회적 위치를 암시하는 상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생산자가 구매자를 유혹하는 손짓일 뿐이다. 그저 본인의 우쭐함을 부채질하는 고도의 상술일 뿐이다.

오래전 친구 집을 방문했는데 족히 팔순은 넘어 보이는 친구 어머님이 거실 탁자에 앉아 노트북을 펼치고 무언가에 열심히 집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여름철 헐렁한 내의에 현란한 손놀림, 그리고 안경 너머 번뜩이는 눈빛은 분명 쇼핑 중이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너무 멋있어 보였다. 나도 나이 들어 저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 모습은 대학교 때 경제학 원론을 강의하셨던 노교수님을 생각나게 하였다. 한 여름날 더운 연구실 창을 열고 열심히 책을 보시고 또 글을 쓰셨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았다. 5층 복도에서 1층 연구실 창으로 바라보던 그 교수님의 헐렁한 하얀 내의는 존경 자체였다. 그때는 에어컨도 드물었지만, 노트북도 없었다. 노트만 있었다. 

사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모습이 어제인 것처럼 선명하기만 하다. 두 분의 모습은 나에게는 동일한 의미이다. 노교수의 모습이나 인터넷 공구에 몰두하는 친구의 노모나 똑같은 인상이다. 여름 헐렁한 내의, 집중하는 눈빛 모두가 같았다. 단지 분은 나름 괜찮은 국립대학의 원로 교수고 한 분은 평범한 노인이었을 뿐이다.

나는 오래전 호텔을 운영했었다. 우리 호텔은 비즈니스호텔이었고, 손님도 회사를 통해서 대부분 예약 하였다. 주로 외국인이었다. 인근에 세계 2, 3위 규모 조선소가 있으니 조그만 호텔임에도 항상 예약은 만원이었다. 손님들이 나보고 항상 하던 말 “에릭* 호텔은 전망 빼고는, 5성급이다.”라고 할 정도로 손님들께 잘했고 또 친했다.

어느 날 한 손님이 아침마다 조식이 끝나고 나면 노트북을 들고 항상 프런트에 나타났다. 나나 직원들에게는 다소의 성가심이었다. 칠십 대쯤 되는 영국인이었다. 그도 편하게 반바지에 헐렁한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항상 출몰함이 젊은 시절 노교수 모습 같았다. 그 영국 신사 이름은 죤이었다. 내가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오셔야 하냐고. 그가 말했다. 전혀 신경 쓰지 말라고. 나는 그가 의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꽤 높은 관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미안하지만, 자기가 매일 아침 오는 이유는 자기 보스에게 보고할 시간이 그때여서라고 했다. 죤은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것이다. 상사에게 혼나기 싫어 아침마다 이메일로 보고하는 칠십 대의 평범한 직장인, 순간 등줄기를 감전시키는 문화적 쇼크. 우리와는 너무 다른 세계였다. 멋있어 보였다. 자기 일에 충실하고 집중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였다. 꼿꼿하게 노트북을 열고 메일을 읽던 노신사의 편안하면서 약간의 긴장된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눈에 선하고 멋있다.

우리 주변은 너무 빨리 늙어 가고 스스로 또한 서둘러 그러는 것 같다. 그러나 일흔이 되어도 노인정에 가면 담배심부름이 싫어 가기 싫다 하니 조만간에 경로당도 사라질 것이다. 스스로가 너무 빨리 늙어 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 생각이 먼저 노쇠해지지 않는지 의문이 들 때도 많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난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다. 껍데기는 늙어가지만 생각은 사춘기 이후 20대에 멈추어져 있는 것 같다. 모두 다 그럴까. 친구들을 만나보면 초등학교 친구는 딱 그 나이 때처럼 어울린다. 중학교ㆍ고등학교 친구도 마찬가지이다. 대학교, 사회 친구들도 철부지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우리는 사춘기 때 형성된 자아로 평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시스템 프로그램은 사춘기 때 뇌리에 컴퓨터 롬* 프로그램처럼 깊이 각인되고 이후의 교육들은 변형이 가능한 운영프로그램*, 그때그때 수시로 바꿀 수 있는 응용프로그램*으로 업그레이드된다면 우리 인생이 설명될까.

나이 아흔에 영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남긴 유튜버의 영상은 나를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 그분은 성실하게 직장을 다니고 후배들의 배웅 속에 화려한 은퇴를 하였다.

“이제 남은 인생은 덤으로 살자.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것 보고, 놀기도 하면서 여생을 즐기자.” 그랬던 것이 직장 생활보다 긴 삼십 년이었다 한다.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다른 삶을 시작했을 텐데.”라고 후회하면서, 늦었지만 이제라도 영어 공부한다는 멋진 그분

호텔 로비에 헐렁한 셔츠차림으로 노트북을 펼치던 영국 노신사, 거실에서 인터넷 쇼핑에 집중하던 나이 드신 친구 어머님, 여름철 내의 차림으로 강의 준비에 몰두하시던 노교수, 아흔의 유튜버, 모두가 나의 인생 멘토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와 도전은 별개라는 생각은 내 위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님을 네 분의 멘토에게서 배우는 정말 기분 좋은 아침이다.

* 롬(ROM) Read only memory : 전원이 꺼져도 수정되지 않는 기기 운용 프로그램

* 운영프로그램 : 윈도우즈, 리눅스 같은 프로그램

* 응용프로그램 : 아래한글, 엑셀 등 주로 사용하는 사무용 프로그램

* 에릭(ERIC) : 필자의 영어 별명

 

신유현

· 거제 아양 출생

· 부산대학교 상과대학 무역학과 졸업

· )삼성전자, 델컴퓨터, AMD 코리아 근무

. )자영업

종합문예지 월간문학세계 제342회 신인문학상 수필부문 당선(2023.01) 

 

거제뉴스와이드 (geojenewswid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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