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1500억 기금, 보여주기식 상생의 역설
최근 변광용 거제시장이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에 ‘지역상생기금’ 명목으로 연간 각 100억 원, 총 1,000억 원 규모의 출연을 요청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도권 언론마저 비판 보도가 잇따르자 지역사회를 넘어 대한민국 전역에 적잖은 파장이 일고 있는 모양새다.
지자체가 지역 대기업에 지역 환원과 상생을 요구하는 시도 자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접근 방식과 배경, 실현 가능성을 따져보면, 이번 제안은 상생이 아닌 ‘보여주기 정치’에 가깝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우선, 기금 조성 요청이 얼마나 사전 협의와 공론화를 거쳤는지 불분명하다. 거제시가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대의를 내세우고 있지만, 이해관계자인 기업과의 충분한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수백억 원 규모의 기금 출연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상생은 강요가 아닌 협의의 산물이어야 하며, 일방적 추진은 기업은 물론 시민들의 신뢰를 잃게 만든다.
또한, 기금의 조성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집행 계획과 투명성이다. 지금까지 거제시가 제시한 청사진은 ‘5년간 연 100억씩’이라는 숫자 외에는 그 구체성이 부족하다. 막대한 금액의 기금이 조성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질적으로 지역사회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될지, 누가 관리하고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기금 규모에 비해 운용 계획이 지나치게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자칫하면 해당 기금이 ‘눈먼 돈’이 되어 또 하나의 행정 낭비 사례로 전락할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가 각계각층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요구가 장기적으로 지역 기업 환경을 악화시킬 가능성이다. 글로벌 조선산업이 치열한 경쟁에 직면한 상황에서 기업이 ‘지역 정치 리스크’를 느낀다면, 새로운 투자나 고용 확대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단기적 성과에 몰두한 나머지 기업과의 관계를 훼손한다면, 결국 피해는 시민과 지역 경제가 떠안게 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거제를 ‘위험한 도시’로 인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당장의 기업 상황을 살펴보더라도, 수년 전 삼성중공업은 조선업 불황 극복을 위해 전 직원의 기본급을 최대 30%까지 반납하는 고강도 자구책을 단행한 바 있다. 이후 흑자 전환에 성공했으며, 이는 전적으로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반납금이 모두 지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역상생기금을 요청하는 것은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조선소 노동자들의 땀으로 쌓아 올린 기업의 자금이 노동자의 의사 참여없이 기금으로 활용될 경우, 노동자 입장에서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의를 앞세우는 과정에서 노동 현실 개선이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노동자들에게 불합리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노동 환경 개선과 지역 기금 조성이 동시에 충족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과연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동의와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반드시 이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방식은 자발적이고 지속 가능해야 하며, 정치적 수단에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지역상생이란, 지자체가 기업과의 신뢰 관계 속에서 상호 유익한 발전 전략을 모색하고, 그 과정에서 시민이 실질적인 혜택을 누리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 거제시에 필요한 것은 보여주기식 기금 조성이 아니라, 기업과 시민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비전’이다.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기보다, 장기적인 신뢰와 협력을 선택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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